오리 이원익선생 종가 호박죽
대이은 검소, 모든 음식 집에 있는 재료로
배추에 생태 꼭꼭 눌려 넣은 김치는 ‘별미’
봄은 아직도 멀었나 보다. 꽃바람 대신 3월에 꽃샘 눈보라가 친다. 영원히 봄은 오지 않을 것만 같아 공포스럽다. 싸락눈이 하늘을 덮은 3월 중순 서울에서 1시간가량 거리에 있는 경기도 광명시 ‘충현박물관’을 찾았다. 물어물어 가는 길은 팀 버튼의 ‘앨리스’로 만든다. 복주머니의 주둥이처럼 박물관 앞은 좁고, 크고 작은 집들이 주변에 즐비하다. 도시 속에 꽁꽁 숨어있다. 충현박물관에는 문화재가 많다. 국가 지정 문화재가 있는 고택은 흔히 너른 주차장과 잘 정비된 도로가 있기 마련인데 충현박물관은 아니다.
3대에 걸쳐 영의정 지내…살아서도 검소 죽어서도 검소
충현박물관은 조선시대 학자 오리 이원익 선생(1546~1634)의 후손들이 사재를 털어 세운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에는 현재 경기도 문화재 제 90호로 지정된 오리 선생의 사저 관감당과 후손이 살던 종택,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1호 오리영우(梧里影宇)와 오리 선생의 영정 4점, 친필 임금의 교서 문집 등 각종 유물 1500여점이 전시되어있다.
연세대 의대 세브란스병원 소아과 교수였던 이원익 선생의 13대 종손 이승규(71)씨가 지난 2003년 정년퇴임을 앞두고 동갑내기 아내 함금자 씨와 함께 문을 열었다. 이씨는 “유물들과 고택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습니다. 주변의 친구들은 이미 고향을 떠난 이들이 많았지요”라고 말한다. “이원익 선생에 대해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지금 세상에 널리 알려도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요”라고 말한다. 그는 <조선왕조실록>등을 공부하고 김홍남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만나 조언도 구했다.
오리 이원익 선생은 조선시대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냈다. 청렴하고 검소한 학자로 알려져 있다. 조세제도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대동법을 주창하기도 했다. 그의 유서에는 ‘내가 죽거든 절대 후하게 장사지내지 말고/ 장지를 고르지 말고/삼년 및 기제에 선조께서 소찬으로 진설한 것을 따르도록 하라/풍수가의 말을 신빙하지 말고 자손대대 한 산지에 장사하여/시제와 속절의 모제 제물은 단지 정결히 할 뿐 사치를 숭상하지 말고’라고 적혀있다. 충현박물관은 종가의 후손이 문을 연 거의 유일한 박물관이다.


그냥 먹다 질려서 색다르게 만들다 보니 함씨표 탄생
이 댁 밥상 역시 오리 선생을 닮아 소박하고 검소하다. 종부 함금자 씨는 “결혼하고 내려오니 대고모님이 계셨어요. 그분께 집안 음식을 배웠지요. 고추장, 된장 직접 담그고 콩나물이나 두부도 직접 만들었지요. 깔끔한 한식이었어요”라고 말한다. 음식은 남아서 버리지 않도록 세심하게 준비했다고 한다. 함씨는 파 써는 것부터 배웠다. “김치는 배추에 생태를 꼭꼭 눌러 넣으셨는데 고모님 아니고는 제대로 넣지도 못했죠.” 이 댁 송기 송편은 쫄깃하고 향긋하다. “삶은 송기(소나무 속 껍질)와 빻은 쌀가루를 섞어 만들었어요. 고모님의 맛은 남달랐어요. 낙지두루치기도 낙지 맛을 많이 살리셨지요.”
집안에 있는 식재료를 최대한 아껴 낭비 없이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함씨도 있는 재료를 이용해서 색다른 음식을 만든다. ‘함씨표 호박죽’이다. 아침마다 먹는 이 호박죽은 그야말로 건강식이다. “마당에 호박을 키웠어요. 늙은 호박으로 처음에는 그냥 호박죽을 만들어 먹었는데 언제부터 질리더라구요. 그래서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서 색다르게 만들었지요”라고 말한다. ‘함씨표 호박죽’은 호박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흰콩, 밤, 우유, 팥, 올리브유까지 고루고루 들어가서 걸쭉하고 고소하다.
첫 한 모금이 확 입안을 당기지는 않지만 한 숟가락 두 숟가락 먹을수록 고소한 맛이 입안에 전해진다. 만드는 법은 복잡해 보이지만 간단하고 세심하다. 채 썬 호박과 양파를 올리브유에 볶고 물을 넣어 익힌다. 흰콩도 불려 익혀두고 삶은 밤까지 합쳐 모두 믹서에 간다. 찹쌀가루를 조금 넣어 죽을 만든다. 완성되면 우유를 조금 넣고 삶은 팥이나 동부(팥보다 조금 큰 콩) 알갱이를 넣어 함께 먹는다. 이 댁 사람들이 건강을 지키는 아침식사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 죽을 먹어왔다. 고혈압이나 여러 가지 노인성 질환을 피한 방법이다.
일흔 넘은 노부부 서로에 지극, 얼굴만 봐도 ‘하하 호호’
종손부부가 건강을 지킨 비법은 한 가지 더 있다. ‘사랑’이다. “무슨 사랑?” 일흔이 넘은 두 사람은 여전히 신혼부부처럼 정겹다. 서로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하하하” 웃음꽃을 피운다. 세상에 절대로 남의 눈을 속일 수 없는 것이 사랑과 방귀라고 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솔솔 밥상에서 피어오른다. “우리는 연애 결혼했죠. 데이트 신청하는 남학생들이 많았는데 모두 거절했죠. 근데 지금 남편만은 마음에 쏙 들었어요. 어딘가 어수룩하고 투박해 보이는 점이 좋았지요”라고 함씨가 말한다. 60년대 초에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세브란스 의과대학 학생이었던 이씨와 연세대학교 간호학과 학생이었던 함씨는 대학 때 만나 사랑하고 결혼했다. “일을 하는 여성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결혼을 하고 그렇게 되지는 않았어요”라고 함씨는 말한다. 그는 학생 때 나라를 위한 지도자가 되라는 이태영 선생(한국 최초의 여성변호사)의 강의를 듣고 크게 감동을 받았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는 결혼하고 광명시 고택에 내려와서 살았다. 종가의 제사도 지내고 문중의 일들을 보살폈다. 남편은 학업을 모두 마친 것이 아니라서 서울 신촌으로 출퇴근을 했다. 인턴을 하면서 집에 내려오지 않은 적도 많았다. 어린 신부는 낯선 환경에서 무섭기도 했다. 당시 그곳은 허허벌판이었다. “집 뒤에 집안 조상들의 무덤이 많았어요. 이원익 선생의 유언 때문이었어요.” 바람이 휙휙 불거나 폭풍우 치는 밤이면 이불 깃을 꼭 쥐고 잠을 청했다. “모든 것을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은 남편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어요”라고 함씨는 말한다. 이씨도 “아내 같은 사람은 없다. 고택을 어떻게 할까 고민할 때에도 아내는 조상들이 물려준 것을 우리 대에 없애버리는 일은 하면 안 된다고 했죠”라고 서로를 칭찬한다. 이씨는 젊은 날 아내의 사진을 최근까지도 지갑에 넣고 다녔다. 지금 그 사진은 빛바랜 누런색을 입고 거실액자에 끼어있다.
종가 살림하다 뒤늦게 박물관장 맡아 꽃 펴


함씨의 꿈은 늦게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가 박물관장을 맡고부터다. 정성스럽게 유물들을 관리하고 도록을 만들어서 다른 나라에 보내기도 하고 종가가 어떻게 지금 세상과 소통해야 하는지 그 방법도 고민한다. ‘영정 보물지정 기념 이원익전’(2005년), ‘종가의 새로운 변모, 충현박물관의 어제와 오늘’(2008년) 같은 전시도 꾸준히 기획중이다. 박물관을 더 잘 운영하기 위해 67세의 나이에 숙명여대 대학원에 입학해 ‘종가박물관의 역할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2008년에는 이원익 선생이 남긴 유산을 잘 지켜낸 공로로 대한민국문화유산상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전국 200여 곳 사립박물관이 회원인 사단법인 한국사립박물관협회 신임회장에 선임되기도 했다.
이원익 종가는 종가로서 독특하다. 불천위제사를 비롯한 모든 제사들을 없앴다. 이원익 선생의 탄신일에 추모행사만 한다. “고민을 많이 하고 결정한 일이죠, 결정은 했지만 아직까지 고민은 계속 하고 있어요, 고택들이 지금 세상과 함께 어울리면서 살아가야 하는 방법을요”라고 함씨가 말한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더 ‘가슴 뛰는 삶’을 살고 있다.
글·사진 박미향 <한겨레> 맛기자 mh@hani.co.kr
대이은 검소, 모든 음식 집에 있는 재료로
배추에 생태 꼭꼭 눌려 넣은 김치는 ‘별미’

3대에 걸쳐 영의정 지내…살아서도 검소 죽어서도 검소
충현박물관은 조선시대 학자 오리 이원익 선생(1546~1634)의 후손들이 사재를 털어 세운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에는 현재 경기도 문화재 제 90호로 지정된 오리 선생의 사저 관감당과 후손이 살던 종택,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1호 오리영우(梧里影宇)와 오리 선생의 영정 4점, 친필 임금의 교서 문집 등 각종 유물 1500여점이 전시되어있다.
연세대 의대 세브란스병원 소아과 교수였던 이원익 선생의 13대 종손 이승규(71)씨가 지난 2003년 정년퇴임을 앞두고 동갑내기 아내 함금자 씨와 함께 문을 열었다. 이씨는 “유물들과 고택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습니다. 주변의 친구들은 이미 고향을 떠난 이들이 많았지요”라고 말한다. “이원익 선생에 대해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지금 세상에 널리 알려도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요”라고 말한다. 그는 <조선왕조실록>등을 공부하고 김홍남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만나 조언도 구했다.
오리 이원익 선생은 조선시대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냈다. 청렴하고 검소한 학자로 알려져 있다. 조세제도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대동법을 주창하기도 했다. 그의 유서에는 ‘내가 죽거든 절대 후하게 장사지내지 말고/ 장지를 고르지 말고/삼년 및 기제에 선조께서 소찬으로 진설한 것을 따르도록 하라/풍수가의 말을 신빙하지 말고 자손대대 한 산지에 장사하여/시제와 속절의 모제 제물은 단지 정결히 할 뿐 사치를 숭상하지 말고’라고 적혀있다. 충현박물관은 종가의 후손이 문을 연 거의 유일한 박물관이다.


그냥 먹다 질려서 색다르게 만들다 보니 함씨표 탄생
이 댁 밥상 역시 오리 선생을 닮아 소박하고 검소하다. 종부 함금자 씨는 “결혼하고 내려오니 대고모님이 계셨어요. 그분께 집안 음식을 배웠지요. 고추장, 된장 직접 담그고 콩나물이나 두부도 직접 만들었지요. 깔끔한 한식이었어요”라고 말한다. 음식은 남아서 버리지 않도록 세심하게 준비했다고 한다. 함씨는 파 써는 것부터 배웠다. “김치는 배추에 생태를 꼭꼭 눌러 넣으셨는데 고모님 아니고는 제대로 넣지도 못했죠.” 이 댁 송기 송편은 쫄깃하고 향긋하다. “삶은 송기(소나무 속 껍질)와 빻은 쌀가루를 섞어 만들었어요. 고모님의 맛은 남달랐어요. 낙지두루치기도 낙지 맛을 많이 살리셨지요.”
집안에 있는 식재료를 최대한 아껴 낭비 없이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함씨도 있는 재료를 이용해서 색다른 음식을 만든다. ‘함씨표 호박죽’이다. 아침마다 먹는 이 호박죽은 그야말로 건강식이다. “마당에 호박을 키웠어요. 늙은 호박으로 처음에는 그냥 호박죽을 만들어 먹었는데 언제부터 질리더라구요. 그래서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서 색다르게 만들었지요”라고 말한다. ‘함씨표 호박죽’은 호박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흰콩, 밤, 우유, 팥, 올리브유까지 고루고루 들어가서 걸쭉하고 고소하다.

일흔 넘은 노부부 서로에 지극, 얼굴만 봐도 ‘하하 호호’
종손부부가 건강을 지킨 비법은 한 가지 더 있다. ‘사랑’이다. “무슨 사랑?” 일흔이 넘은 두 사람은 여전히 신혼부부처럼 정겹다. 서로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하하하” 웃음꽃을 피운다. 세상에 절대로 남의 눈을 속일 수 없는 것이 사랑과 방귀라고 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솔솔 밥상에서 피어오른다. “우리는 연애 결혼했죠. 데이트 신청하는 남학생들이 많았는데 모두 거절했죠. 근데 지금 남편만은 마음에 쏙 들었어요. 어딘가 어수룩하고 투박해 보이는 점이 좋았지요”라고 함씨가 말한다. 60년대 초에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세브란스 의과대학 학생이었던 이씨와 연세대학교 간호학과 학생이었던 함씨는 대학 때 만나 사랑하고 결혼했다. “일을 하는 여성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결혼을 하고 그렇게 되지는 않았어요”라고 함씨는 말한다. 그는 학생 때 나라를 위한 지도자가 되라는 이태영 선생(한국 최초의 여성변호사)의 강의를 듣고 크게 감동을 받았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는 결혼하고 광명시 고택에 내려와서 살았다. 종가의 제사도 지내고 문중의 일들을 보살폈다. 남편은 학업을 모두 마친 것이 아니라서 서울 신촌으로 출퇴근을 했다. 인턴을 하면서 집에 내려오지 않은 적도 많았다. 어린 신부는 낯선 환경에서 무섭기도 했다. 당시 그곳은 허허벌판이었다. “집 뒤에 집안 조상들의 무덤이 많았어요. 이원익 선생의 유언 때문이었어요.” 바람이 휙휙 불거나 폭풍우 치는 밤이면 이불 깃을 꼭 쥐고 잠을 청했다. “모든 것을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은 남편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어요”라고 함씨는 말한다. 이씨도 “아내 같은 사람은 없다. 고택을 어떻게 할까 고민할 때에도 아내는 조상들이 물려준 것을 우리 대에 없애버리는 일은 하면 안 된다고 했죠”라고 서로를 칭찬한다. 이씨는 젊은 날 아내의 사진을 최근까지도 지갑에 넣고 다녔다. 지금 그 사진은 빛바랜 누런색을 입고 거실액자에 끼어있다.
종가 살림하다 뒤늦게 박물관장 맡아 꽃 펴


함씨의 꿈은 늦게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가 박물관장을 맡고부터다. 정성스럽게 유물들을 관리하고 도록을 만들어서 다른 나라에 보내기도 하고 종가가 어떻게 지금 세상과 소통해야 하는지 그 방법도 고민한다. ‘영정 보물지정 기념 이원익전’(2005년), ‘종가의 새로운 변모, 충현박물관의 어제와 오늘’(2008년) 같은 전시도 꾸준히 기획중이다. 박물관을 더 잘 운영하기 위해 67세의 나이에 숙명여대 대학원에 입학해 ‘종가박물관의 역할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2008년에는 이원익 선생이 남긴 유산을 잘 지켜낸 공로로 대한민국문화유산상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전국 200여 곳 사립박물관이 회원인 사단법인 한국사립박물관협회 신임회장에 선임되기도 했다.
이원익 종가는 종가로서 독특하다. 불천위제사를 비롯한 모든 제사들을 없앴다. 이원익 선생의 탄신일에 추모행사만 한다. “고민을 많이 하고 결정한 일이죠, 결정은 했지만 아직까지 고민은 계속 하고 있어요, 고택들이 지금 세상과 함께 어울리면서 살아가야 하는 방법을요”라고 함씨가 말한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더 ‘가슴 뛰는 삶’을 살고 있다.

| |
글·사진 박미향 <한겨레> 맛기자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