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명물 납작만두
눈으로라도 배 부르라고 크기 부풀린 지혜
응큼한 작업 만두가게 주인 고려 가사 등장
가난한 어린 시절에 먹었던 음식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일명 ‘뽑기’라고 불렀던 달고나나 설탕과자, 어머니 몰래 집어먹었던 생쌀 등. 아련한 추억이 있다. ‘납작만두’도 그런 음식이다. 대구가 고향인 사람은 누구나 어린 시절 기억 속에 ‘납작만두’가 있다. 말 그대로 납작하게 생긴 만두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빵빵한 만두가 아니다. 헐벗었던 우리네 골목처럼 가난하지만 정겨운 만두다.
삶은 뒤 1시간 정도 물에 담가둔 뒤 구워
대구에서 ‘납작만두’가 유명한 집은 대구 남산동의 <미성당만두>다. 이 집은 1963년 임창규(2006년 작고)씨가 문을 열었다. 그는 한국전쟁의 상처가 채 가시 않았던 시절, 구하기 쉬운 재료로 만두를 빚었다. 밀가루, 부추, 당면, 파가 재료다.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만두피를 만들고 소로 부추, 당면, 파를 넣는다. 하지만 그 양이 아주 적다. 다 빚은 만두는 삶은 후에 1시간 정도 담가둔다. 시간이 지나면 만두는 크기가 처음보다 커져있다. 음식의 양을 추구하던 그 시절의 지혜가 숨어 있다.
이것으로 조리과정이 끝난 것은 아니다. 물기를 빼고 넓은 프라이팬에 구워야만 진정한 ‘납작만두’가 탄생한다. 먹을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던 탓에 프라이팬에 구을 때, 돼지비계를 기름 대신 쓰기도 했다고 한다. 고기를 자주 먹을 수 없었던 시절 그 향으로 대리만족을 했다. 이 만두는 먹는 법도 남다르다. 만두 위에 간장과 고춧가루, 채 썬 파를 뿌리고 먹는다. 어우러지는 묘한 맛이 있다. 푸근하다. 설에 용돈을 집어주는 할아버지 마음 같다.
지금 <미성당만두>는 작고한 아버지를 대신해 아들 임수종(47)씨가 대를 이어가고 있다. “포장은 예전에 하는 식 그대로입니다. 두꺼운 비닐에 만두를 싸고 다시 신문지로 둘둘 말아 종이봉지에 담아 드리지요”라고 임씨가 말을 한다. 70년대 드라마 한 편을 보는 듯하다. 임씨는 27살부터 아버지를 도와 이 집을 꾸려왔다.
‘반달만두’, ‘거지만두’, ‘풀만두’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 만두는 볼수록 정겹다. <미성당만두>집은 낡은 문짝, 아무렇게나 걸어둔 달력, 바닥에 뒹구는 누런 신문지, 흠집 난 수저들, 어디 하나 세련된 구석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줄을 서서 만두를 기다린다. 명절에 고향을 찾은 이들도 이곳을 들른다. 고향의 맛은 생명력이 길다. (미성당만두 053-252-1233)
중국에서 들어왔지만 다양하게 창의적 변모

만두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친근한 먹을거리다. 중국에서 왔지만 우리 만두만의 역사와 전통이 있다. 고려가요 ‘쌍화점’에는 “쌍화점에 쌍화 사러가고 신딘 회회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만두가게에 만두를 사러갔는데 만두 파는 아비가 내 손을 잡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 ‘쌍화’라고 불렀던 만두는 조선시대에는 ‘상화’가 되었다. 본격적으로 만두라고 부르기 시작한 때는 정확하지 않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 조상들의 창의력이다. 중국처럼 만두피를 밀가루로만 만들지 않았다. 메밀가루나 강냉이가루도 사용했고 채소나 생선의 껍질도 이용했다.
조선시대 한글 음식조리서 <음식디미방>에는 메밀과 꿩고기를 이용해 만든 만두에 대한 기록이 있다. “메밀가루를 눅직하게 반죽하여 개암알만큼씩 떼어 빚는다. 만두소 장만은 무를 아주 무르게 삶아 덩어리 없이 으깨고 꿩의 연한 살을 다져 간장 기름에 볶아 백자, 후추, 천초가루로 양념하여 초간장에 생강즙을 하여 먹도록 한다”라고 적혀 있다. 함경도에서는 강냉이가루를 피로 쓰기도 했다.
독특한 만두들도 많았다. 굴림만두는 만두피를 만들지 않고 만두의 소로만 완자를 만들어서 밀가루에 굴려 만들었다. 평안도의 대표적인 겨울 음식이었다. 생선껍질을 만두피로 쓴 어만두도 있었다. 민어나 숭어 등의 흰살 생선껍질을 사용했다. 동아만두는 박과에 속하는 동아의 껍질을 벗기고 그 안의 하얀 속을 얇게 잘라 만두피로 썼다. 만두피에 소가 비친다. 그런가 하면 준치만두는 생선 준치를 으깨고 다진 쇠고기 등과 함께 돌돌 말아 녹말을 묻혀 찐 만두다. 이 만두들에 사람들의 추억이 담겨 지금까지 맛난 먹을거리 이야기를 이어오고 있다.
글·사진 박미향 <한겨레>맛기자 mh@hani.co.kr
눈으로라도 배 부르라고 크기 부풀린 지혜
응큼한 작업 만두가게 주인 고려 가사 등장
가난한 어린 시절에 먹었던 음식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일명 ‘뽑기’라고 불렀던 달고나나 설탕과자, 어머니 몰래 집어먹었던 생쌀 등. 아련한 추억이 있다. ‘납작만두’도 그런 음식이다. 대구가 고향인 사람은 누구나 어린 시절 기억 속에 ‘납작만두’가 있다. 말 그대로 납작하게 생긴 만두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빵빵한 만두가 아니다. 헐벗었던 우리네 골목처럼 가난하지만 정겨운 만두다.
삶은 뒤 1시간 정도 물에 담가둔 뒤 구워

이것으로 조리과정이 끝난 것은 아니다. 물기를 빼고 넓은 프라이팬에 구워야만 진정한 ‘납작만두’가 탄생한다. 먹을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던 탓에 프라이팬에 구을 때, 돼지비계를 기름 대신 쓰기도 했다고 한다. 고기를 자주 먹을 수 없었던 시절 그 향으로 대리만족을 했다. 이 만두는 먹는 법도 남다르다. 만두 위에 간장과 고춧가루, 채 썬 파를 뿌리고 먹는다. 어우러지는 묘한 맛이 있다. 푸근하다. 설에 용돈을 집어주는 할아버지 마음 같다.
지금 <미성당만두>는 작고한 아버지를 대신해 아들 임수종(47)씨가 대를 이어가고 있다. “포장은 예전에 하는 식 그대로입니다. 두꺼운 비닐에 만두를 싸고 다시 신문지로 둘둘 말아 종이봉지에 담아 드리지요”라고 임씨가 말을 한다. 70년대 드라마 한 편을 보는 듯하다. 임씨는 27살부터 아버지를 도와 이 집을 꾸려왔다.
‘반달만두’, ‘거지만두’, ‘풀만두’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 만두는 볼수록 정겹다. <미성당만두>집은 낡은 문짝, 아무렇게나 걸어둔 달력, 바닥에 뒹구는 누런 신문지, 흠집 난 수저들, 어디 하나 세련된 구석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줄을 서서 만두를 기다린다. 명절에 고향을 찾은 이들도 이곳을 들른다. 고향의 맛은 생명력이 길다. (미성당만두 053-252-1233)
중국에서 들어왔지만 다양하게 창의적 변모

만두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친근한 먹을거리다. 중국에서 왔지만 우리 만두만의 역사와 전통이 있다. 고려가요 ‘쌍화점’에는 “쌍화점에 쌍화 사러가고 신딘 회회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만두가게에 만두를 사러갔는데 만두 파는 아비가 내 손을 잡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 ‘쌍화’라고 불렀던 만두는 조선시대에는 ‘상화’가 되었다. 본격적으로 만두라고 부르기 시작한 때는 정확하지 않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 조상들의 창의력이다. 중국처럼 만두피를 밀가루로만 만들지 않았다. 메밀가루나 강냉이가루도 사용했고 채소나 생선의 껍질도 이용했다.
조선시대 한글 음식조리서 <음식디미방>에는 메밀과 꿩고기를 이용해 만든 만두에 대한 기록이 있다. “메밀가루를 눅직하게 반죽하여 개암알만큼씩 떼어 빚는다. 만두소 장만은 무를 아주 무르게 삶아 덩어리 없이 으깨고 꿩의 연한 살을 다져 간장 기름에 볶아 백자, 후추, 천초가루로 양념하여 초간장에 생강즙을 하여 먹도록 한다”라고 적혀 있다. 함경도에서는 강냉이가루를 피로 쓰기도 했다.
독특한 만두들도 많았다. 굴림만두는 만두피를 만들지 않고 만두의 소로만 완자를 만들어서 밀가루에 굴려 만들었다. 평안도의 대표적인 겨울 음식이었다. 생선껍질을 만두피로 쓴 어만두도 있었다. 민어나 숭어 등의 흰살 생선껍질을 사용했다. 동아만두는 박과에 속하는 동아의 껍질을 벗기고 그 안의 하얀 속을 얇게 잘라 만두피로 썼다. 만두피에 소가 비친다. 그런가 하면 준치만두는 생선 준치를 으깨고 다진 쇠고기 등과 함께 돌돌 말아 녹말을 묻혀 찐 만두다. 이 만두들에 사람들의 추억이 담겨 지금까지 맛난 먹을거리 이야기를 이어오고 있다.
글·사진 박미향 <한겨레>맛기자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