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혜도 아닌 것이, 식해도 아닌 것이

박미향 2010.04.13
조회수 15470 추천수 0
강릉 창녕 조씨 포식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짭짜름한 밥도둑
씨종지떡이나 묵나물도 이름만큼 오묘


 
‘포식혜’ 이름이 낯설다. 한국전통음식을 연구한 조리서에서도 보기 드문 이름이다. ‘식혜’하면 쌀밥을 엿기름물로 삭혀서 만든 우리나라 화채가 떠오른다. 음료가 별로 없던 시절 어머니는 얼음 동동 띄운 달짝지근한 식혜를 만들어주셨다. 우리네 훌륭한 마실거리였다. 하지만 포식혜는 마실거리는 아니다. 오히려 생선과 소금, 밥을 섞어 삭힌 ‘식해’와 비슷하다. 하지만 생선이 들어가지 않는다. 죽순, 동아(박과 식물)를 넣어 만든 죽순식해나 동아식해도 있지만 이것과도 또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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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저것 이리저리 충돌해 요상한 맛
 
이 신기한 음식은 강릉 창녕조씨 종가댁의 내림음식이다. 맛은 짭짜름하고 색은 붉다. 밥반찬으로 그만이다. 이 댁 9대 종부 최영간(64)씨는 시어머니 김쌍기(88)씨에게서 배웠다. 최씨는 “종가라서 제사가 많았어요. 명태포나 오징어포나 각종 포들이 많이 남았죠. 어머니는 아깝다고 하셨죠. 그 포를 이용해서 만든 음식입니다”라고 말한다. 포식혜는 만들기가 간단하다. 명태포나 오징어포 등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물에 적셔둔다. 그 포에 엿기름, 고춧가루, 찹쌀밥, 무를 섞어 삭히면 된다. 이때 무가 중요하다. 무를 큼지막하게 썰어 넣어서는 안된다. “콩알 크기만하게 썰어요, 무가 삭으면 효소가 나와요. 2주 정도 지나면 독 위로 물이 올라오는데 그때 먹으면 됩니다”라고 최씨가 일러준다.
 
박미향-15 copy.jpg적은 양을 만들어서 필요할 때마다 먹는 음식이다. 주홍치마처럼 색이 붉어 맛을 보지 않아도 매운 느낌이다. 하지만 맵지 않다. 은은한 맛이 유유하게 흐르는 우리 강을 닮았다. 시인 백석(백기행 1912~1995)이 국수를 두고 ‘아 반가운 것’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포식혜도 반가운 음식이다. 살아남은 음식이다. 살짝 딱딱한 포와 뭉클하게 삭은 밥알들이 이리저리 충돌해서 요상한 맛을 낸다. 최영간씨는 어쩌면 사라져버렸을 포식혜같은 우리 먹을거리를 잘 보존했다.
 
26살이 되던 해 이 댁 며느리가 된 최씨는 재미있는 장면을 만났다. 모내기를 하기로 한 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 댁에 모였다. 한나절 모두 힘을 합쳐 모내기를 마치자 시어머니는 못밥상을 차렸다. 들과 산에서 자란 나물들을 뜯어 무쳐서 삶은 팥이 들어간 따끈한 쌀밥과 함께 상에 올렸다. 힘든 노동을 마치고 먹는 밥만큼 맛난 것이 있을까! 웃음꽃 피우고 식사를 끝내자 사람들은 다른 집으로 건너갔다. 일종의 품앗이였던 셈이다. 한달 동안 마을의 모내기는 이어진다. 김매기를 할 때도 비슷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일꾼들을 ‘질꾼’이라고 불렀다.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일을 했다. 질꾼들은 일이 끝나면 질상을 받았다. 질상은 못밥상보다 화려하다. 잡채나 호박전이나 메밀묵, 감자떡 등이 올라간다. 볍씨의 일부를 따로 두었다가 만든 씨종지떡도 한 자리 차지했다. 씨종지떡은 설탕이 흔하지 않던 시절 단맛을 내기 위해 호박오가리, 대추 등을 넣어 만든 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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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하니 차려지는 일꾼들 밥상인 질상…전통음식점으로 부활
 
“70년대 언제부턴가 사라졌어요. 결혼해 온 이후 몇 번 못 봤어요. 시아버님은 일찍 돌아가시고 시할아버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자애로우셨지요. 며느리, 손주 며느리 모두 아끼셨어요. 질꾼들을 잘 챙기셨어요.” 시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뭉클뭉클 들 때면 못밥상과 질상이 생각났다고 한다. 1998년 최씨는 그 그리움 때문에 일을 저질렀다.
 “여학교 선배가 농촌지도소(농촌기술센터)에서 일했어요. 시할아버님이야기와 못밥상과 질상 이야기를 했어요. 당시 ‘농촌주부일손가꾸기’ 같은 농촌지원 사업들이 있었는데 그분이 그곳과 연결시켜 주었지요.” 그는 집안의 내림음식들과 못밥상, 질상을 ‘서지초가뜰’이라는 간판을 단 전통음식점을 열어 선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서 하는 식 그대로예요. 우리가 농사지은 쌀과 집 주변에 나는 산나물로 밥상을 차려요.”
 
이 댁 나물 맛도 포식혜나 씨종지떡만큼이나 독특하다. “묵나물로 만들어서 그래요. 왜 이름이 묵나물이냐면 묵혔다가 만든 나물이라서 그래요.” 묵나물은 제철에 뜯어두었다가 이듬해 봄에 먹는 나물을 이르는 말이다. 이 댁은 제철 나물을 뜯어서 햇볕에 말린다. 꾸덕꾸덕 마르면 삶고 집된장이나 간장으로 무친다. 마늘도 거의 넣지 않는다. 깨가루와 들기름으로 무쳐서 더 고소하다. 부드럽기가 솜털 같고 쫄깃하기가 찰떡 같다. 3~4가지 나오는 나물들이 각자 자신의 색깔을 드러낸다.
 
두고 온 고향땅의 흙냄새가 폴폴 고소하게 난다. 담백한 맛에 반해 버린다. 숭늉은 또 어떠한지! 잊고 지낸 외할머니의 손맛이 생각난다. “쌀을 도정하다가 남는 싸라기를 숭늉 만들 때 넣어요. 우리 쌀은 향쌀이라고 해서 맛도 좋지요.” 맛난 숭늉의 비결을 최씨가 말해준다.
 
신혼 부부가 들르면 아주 특별히 화전 대접
 
박미향-17 copy.jpg조상들의 맛을 잇고 이 댁을 지킨 사람들은 여자들이다. 최씨의 시어머니 8대 종부 김쌍기씨는 남편이 일찍 세상을 뜨자 시아버지를 모시고 7남매를 키워냈다. “시어머니는 소박하고 씩씩한 여성이지죠, 지금도 팔순이 넘으셨지만 영민하셔요”라고 최씨가 말한다.
 
김쌍기 선생은 18살 시집올 때 가져온 농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김씨의 친정아버지에 대한 소중한 추억과 가르침 때문이다. 농 문짝 안쪽에는 친정아버지의 당부의 글이 적혀 있다. ‘발의 거동은 무거우며 손의 거동은 공손하며’로 시작하는 글은 마지막에 ‘눈빛거동은 씩씩히 할디니라’로 끝난다.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라는 말이다. 최영간씨는 그런 시어머니를 도와 집안을 지켰다. 최씨가 말한다. “결혼하고 왔을 때 막내 도련님이 초등학교 3학년이었어요. 형수님 소리도 못했지요.” 9대 종손인 남편 조옥현(68)씨를 따라 한때 도시에 나가 산 적도 있지만 몇 년 되지 않는다. “맏이로서 동생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다 보니 도시에도 나가게 되었죠.” 그런 집안의 역사 때문에 시누이들도 언니처럼 최씨를 따른다.
 
최씨는 신혼부부가 ‘서지초가뜰’을 찾으면 종종 화전을 만들어 낸다. 집 주변에 피는 들꽃들을 따서 만든다. 태극모양으로 만든 화전도 있다. “종부로 살면서 내 아이들 잘못 챙겼어요. 우리 아들 내외 같아 보이죠. 태극모양은 태양 같은 자손을 누구든 얻으라는 뜻으로 만들었어요”라고 말한다. 음식은 먹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서지초가뜰’로 들어서는 길은 좁다. 구불구불 길을 걷다가 쉬다가를 여러 번 하다보면 아담하고 예쁜 한옥이 나온다. 한옥 앞에는 논이 있고 뒷산에는 대나무 숲이 넓게 펼쳐져 있다. 휘릭 바람이 세상소리를 전한다. 여행객들에게 한자락 봄바람이 분다.
 
 

◈ 종부 최영간씨가 알려주는 포식혜 만드는 법
 
1. 명태포, 오징어포 같은 말린 포들을 준비한다. 물에 촉촉하게 적셔둔다.
2. 포들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고 찹쌀로 밥을 해둔다. 포가 밥공기로 하나 정도 양이면 찹쌀은 1킬로그램 정도로 한다.
3. 무는 작은 콩 크기 정도로 자른다. 채썬 무는 밥 공기 하나 정도 양.
4. 포와 무와 엿기름(밥공기 하나 정도 양)와 찹쌀, 고춧가루(밥공기로 두 개 혹은 두 개 반)를 작은 단지에 담아 2주간 삭힌다. 으깬 마늘(밥 공기 한 숟가락 정도), 소금(밥 공기 반 정도)을 넣는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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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 기자
한겨레신문에서 음식문화에 관한 다양한 기사를 쓰고 있다. 2000년에 직장인들의 야식을 주제로 한 연재물 '밤참'을 시작으로 먹을거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인생이 있는 식탁> 등 4권의 음식 관련 책을 냈다. MBC <여성시대> 등에 출연해 맛난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체력과 품 넓은 열정을 재산 삼아 맛과 이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문화 정착에 자신의 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행복의 시작은 밥상이 출발이라고 믿는다.
이메일 : mh@hani.co.kr       트위터 : psols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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