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 황윤석 전주 종가 무찌개
쫄깃한 쇠고기와 아삭한 무의 40년 궁합
가마솥밥 끓을 때 익힌 간조기찜도 예술

뚝딱뚝딱, 한 시간이 채 안 걸린다. ‘무찌개’와 ‘간조기찜’은 빠른 시간에 식탁에 모습을 드러낸다. ‘무찌개’는 이름도 낯설다. 무조림도 아니고 무국도 아니고 생채무무침도 아닌 이 음식은 도대체 어떤 맛일까? ‘무찌개’는 ‘냉정과 열정 사이’에 있었다. 찬 생채무무침과 비슷한 모양의 무들이 뜨거운 무국 안에 소담하게 들어앉은 모양이다. 국어사전에는 ‘무찌개란 무에 고기, 파, 간장, 기름 따위를 넣고 한데 섞어서 밥에 쪘다가 끓인 반찬’이라고 설명돼 있다.
미식가 시아버지 입맛 맞추다 보니 솜씨 저절로
조선 후기 호남 실학의 거목 이재 황윤석(1729~1791)의 7대손이자 서예가인 황욱(1898~1993)의 종가에서는 밥에 찌지 않는다. 그야말로 무가 주인공인 ‘찌개’다. 그의 며느리 전인주(72)씨가 손님이 찾아오면 자주 내는 음식이다. 쇠고기를 잘게 자르고 무도 길게 채를 썬다. 소금은 넣지 않고 집간장으로만 간을 한다. 끓이는 시간이 중요하다. 알맞은 시간에 끓여내야 쇠고기의 쫄깃한 질감과 아삭한 무의 격이 살아남는다. 전씨의 40년 넘는 ‘감’이다.
이재 황윤석 전주종가는 둘째였던 황욱이 고향인 전북 고창을 떠나 전주로 이사 오면서 시작된 종가다. 고창에는 맏아들의 자손들로 이어지는 종가가 있다.

‘간조기찜’은 가을에 구입한 조기를 소금에 3개월 동안 재워두었다가 이듬해 꺼내서 쪄먹는 음식이다. 예전에는 가마솥에서 익혔다. 무슨 소리냐고요? 가마솥에 밥을 짓기 위해 불을 때면 ‘훅’ 하고 끓어오른다. 이때 물을 살짝 넣은 간조기 냄비를 넣는다. 밥이 되는 동안 조기도 함께 익는다.
전씨는 “아버님이 좋아하셨어요. 찜을 하지 않고 말려서 밥반찬으로도 자주 드셨어요”라고 말한다. 전씨의 소문난 음식 솜씨는 오로지 시아버지 때문이다. 평소 미식가인데다가 예민한 혀를 가진 시아버지의 입맛을 맞추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실력이 늘었다. 95살까지 장수한 황욱의 밥상은 그야말로 건강식이다. 그는 튀긴 음식은 전혀 먹지 않았고 찐 음식만 먹었다고 한다. “하루에 깨죽이나 잣죽 한 끼는 꼭 드셨고요, 제철 음식을 담백하게 만들거나 식재료의 자체의 맛을 살린 음식을 특히 좋아하셨어요.”
“여성은 50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돼요”
황욱은 좌익활동을 하다 사형선고를 받았던 큰아들과 이산가족이 된 둘째아들 때문에 평생 속앓이를 했지만 건강만은 지켜냈다. 밥상 덕분이다. 국악 활동을 했던 셋째 아들 황병근(78)씨는 아내 전씨의 공이라고 말한다.
전씨는 지금 ‘한국전례연구원 전북예절원’ 원장을 하면서 대학이나 기업체에 예절강의를 하고 있다. 칠순이 넘은 나이지만 정열적이다. 큰 시숙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한동안 백수였던 남편 황병근씨를 대신에 집안을 지켰다. 초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3남1녀를 키웠다. “남편에 대한 믿음이 있었지요. 돈이 없어서 남의 집 마당에 텐트를 치고 살 때도 믿음은 변함이 없었어요”라고 말한다.

그는 시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크다. 황욱이 큰아들을 살리기 위해 나선 일들을 이야기한다. “매일 경무대(지금 청와대)에 당신의 서예로 쓴 탄원서를 보내고 그 앞에 출근하다시피 하셨어요.” 당시 집권하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우연히 경무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황욱을 발견하고서야 그의 탄원서를 읽었다. 그 탄원서 덕분에 큰아들 황병선씨는 사형을 면했고 윤보선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20년으로 감형되었다. 안타깝게도 출소한 후 4년 만에 그는 사망했다.
황욱은 북에 있는 둘째아들도 그리워했다. 김대중정권 때 겨우 화상 상봉을 할 수 있었지만 이미 황욱은 이 세상 사람은 아니었다. “그 모든 시련을 서예로 이겨내신 분이었죠, 아버님 글자 한 점 받으려고 사람들이 줄을 섰죠. 살아계실 때도 초청 서예전을 많이 하셨고 돌아가신 후에도 후배들이 회고전을 열어 주었어요”라고 말한다. 1999년에 황씨 부부는 집안의 유물과 황욱과 관련된 유품 5200점을 전주 국립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황병근씨는 연좌제가 풀린 후에 ‘전라북도 도립 국악원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라북도 지회장’ 등을 지냈다. 끈질기게 삶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관현악단을 운영하고 국악 활동을 한 덕분이었다.
전씨는 “여성은 50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인생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해요”라고 방긋 웃는다. 그의 무던한 웃음과 ‘무찌개’가 함께 어우러져 전주 한옥의 마당 한쪽이 평화롭다.
쫄깃한 쇠고기와 아삭한 무의 40년 궁합
가마솥밥 끓을 때 익힌 간조기찜도 예술

뚝딱뚝딱, 한 시간이 채 안 걸린다. ‘무찌개’와 ‘간조기찜’은 빠른 시간에 식탁에 모습을 드러낸다. ‘무찌개’는 이름도 낯설다. 무조림도 아니고 무국도 아니고 생채무무침도 아닌 이 음식은 도대체 어떤 맛일까? ‘무찌개’는 ‘냉정과 열정 사이’에 있었다. 찬 생채무무침과 비슷한 모양의 무들이 뜨거운 무국 안에 소담하게 들어앉은 모양이다. 국어사전에는 ‘무찌개란 무에 고기, 파, 간장, 기름 따위를 넣고 한데 섞어서 밥에 쪘다가 끓인 반찬’이라고 설명돼 있다.
미식가 시아버지 입맛 맞추다 보니 솜씨 저절로
조선 후기 호남 실학의 거목 이재 황윤석(1729~1791)의 7대손이자 서예가인 황욱(1898~1993)의 종가에서는 밥에 찌지 않는다. 그야말로 무가 주인공인 ‘찌개’다. 그의 며느리 전인주(72)씨가 손님이 찾아오면 자주 내는 음식이다. 쇠고기를 잘게 자르고 무도 길게 채를 썬다. 소금은 넣지 않고 집간장으로만 간을 한다. 끓이는 시간이 중요하다. 알맞은 시간에 끓여내야 쇠고기의 쫄깃한 질감과 아삭한 무의 격이 살아남는다. 전씨의 40년 넘는 ‘감’이다.
이재 황윤석 전주종가는 둘째였던 황욱이 고향인 전북 고창을 떠나 전주로 이사 오면서 시작된 종가다. 고창에는 맏아들의 자손들로 이어지는 종가가 있다.

‘간조기찜’은 가을에 구입한 조기를 소금에 3개월 동안 재워두었다가 이듬해 꺼내서 쪄먹는 음식이다. 예전에는 가마솥에서 익혔다. 무슨 소리냐고요? 가마솥에 밥을 짓기 위해 불을 때면 ‘훅’ 하고 끓어오른다. 이때 물을 살짝 넣은 간조기 냄비를 넣는다. 밥이 되는 동안 조기도 함께 익는다.
전씨는 “아버님이 좋아하셨어요. 찜을 하지 않고 말려서 밥반찬으로도 자주 드셨어요”라고 말한다. 전씨의 소문난 음식 솜씨는 오로지 시아버지 때문이다. 평소 미식가인데다가 예민한 혀를 가진 시아버지의 입맛을 맞추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실력이 늘었다. 95살까지 장수한 황욱의 밥상은 그야말로 건강식이다. 그는 튀긴 음식은 전혀 먹지 않았고 찐 음식만 먹었다고 한다. “하루에 깨죽이나 잣죽 한 끼는 꼭 드셨고요, 제철 음식을 담백하게 만들거나 식재료의 자체의 맛을 살린 음식을 특히 좋아하셨어요.”
“여성은 50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돼요”
황욱은 좌익활동을 하다 사형선고를 받았던 큰아들과 이산가족이 된 둘째아들 때문에 평생 속앓이를 했지만 건강만은 지켜냈다. 밥상 덕분이다. 국악 활동을 했던 셋째 아들 황병근(78)씨는 아내 전씨의 공이라고 말한다.
전씨는 지금 ‘한국전례연구원 전북예절원’ 원장을 하면서 대학이나 기업체에 예절강의를 하고 있다. 칠순이 넘은 나이지만 정열적이다. 큰 시숙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한동안 백수였던 남편 황병근씨를 대신에 집안을 지켰다. 초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3남1녀를 키웠다. “남편에 대한 믿음이 있었지요. 돈이 없어서 남의 집 마당에 텐트를 치고 살 때도 믿음은 변함이 없었어요”라고 말한다.

그는 시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크다. 황욱이 큰아들을 살리기 위해 나선 일들을 이야기한다. “매일 경무대(지금 청와대)에 당신의 서예로 쓴 탄원서를 보내고 그 앞에 출근하다시피 하셨어요.” 당시 집권하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우연히 경무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황욱을 발견하고서야 그의 탄원서를 읽었다. 그 탄원서 덕분에 큰아들 황병선씨는 사형을 면했고 윤보선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20년으로 감형되었다. 안타깝게도 출소한 후 4년 만에 그는 사망했다.
황욱은 북에 있는 둘째아들도 그리워했다. 김대중정권 때 겨우 화상 상봉을 할 수 있었지만 이미 황욱은 이 세상 사람은 아니었다. “그 모든 시련을 서예로 이겨내신 분이었죠, 아버님 글자 한 점 받으려고 사람들이 줄을 섰죠. 살아계실 때도 초청 서예전을 많이 하셨고 돌아가신 후에도 후배들이 회고전을 열어 주었어요”라고 말한다. 1999년에 황씨 부부는 집안의 유물과 황욱과 관련된 유품 5200점을 전주 국립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황병근씨는 연좌제가 풀린 후에 ‘전라북도 도립 국악원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라북도 지회장’ 등을 지냈다. 끈질기게 삶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관현악단을 운영하고 국악 활동을 한 덕분이었다.
전씨는 “여성은 50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인생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해요”라고 방긋 웃는다. 그의 무던한 웃음과 ‘무찌개’가 함께 어우러져 전주 한옥의 마당 한쪽이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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