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삼동 쉐죠이
영화하러 떠났다가 ‘새 사랑’ 만나 혀 단련
한국 와인의 역사…빵과 커피 향기 곁들여

내리쬐는 햇볕이 아스팔트를 달군다. 역삼동 좁은 골목을 걷다가 와인집 ‘쉐죠이’로 향한다. 삐걱, 문을 열고 들어간 대낮의 쉐죠이는 어둡다. 문턱을 넘자마자 향긋한 빵 냄새가 반긴다. 한 사내가 엉거주춤 일어나서 차림표를 내민다. 탱탱한 스파게티면 같은 파머머리가 고슬고슬 어깨까지 내려오고 언뜻 봐도 키는 180센티미터 넘어 보인다. 훤하다. 하얀 피부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자장가처럼 흘러나온다. 한눈에 사람을 사로잡는 힘이 있다.
샹송에 어울리는 목소리의 불문학도, 와인을 인생 동반자로
그가 커피 한 잔과 두 개의 번을 내온다. 번(bun)은 영국 요크셔지방 등에서 즐겨먹는 빵이다. 밀가루, 설탕, 달걀, 이스트, 버터로 만든다. 납작한 바닥과 둥근 모양, 단맛이 특징이다. 문지방을 넘자마자 코끝을 유혹한 향은 바로 이 번이었다.
사내의 이름은 ‘안준범’(41)이다. 그는 와인세계에서 알아주는 사람이다. 몇 달 전 <와인 읽는 CEO>란 책도 출간했다. 2000년부터 보드로와인아카데미, 경희대, 중앙대 등에서 와인에 대해 꾸준히 강의했다. 한때 매일유업에서 만든 와인수입업체 레뱅드매일에서 와인 셀렉션 업무를 맡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그의 이름을 치면 그와 관련된 뉴스가 수두룩하게 뜬다.

2001년 그의 와인집 쉐죠이를 열었을 때 한국에는 와인집이라고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와인에 대한 관심은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그것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 줄 사람은 드물었다. 그때 그가 해결사였다. 그의 이력 때문이었다.
그는 한국외국어대 불어학과를 다니다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 영화연극을 공부하기 위해서였지만 와인 세계에 더 깊이 빠졌다. 철학공부까지 마친 그는 <와인과 시>란 논문을 썼다. 이미 옛사랑(영화, 연극)에게서 마음이 떠난 그는 가슴 두근거리는 새로운 사랑(와인)을 찾아 길을 나섰다. 파리3대학과 소르본대학에서 학사학위 3개를 따고 와인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 론에 있는 포도주대학 ‘유니베리시떼 뒤 뱅’에서 와인을 공부했고 이탈리아로 넘어가 와인 스승을 만났다. ‘피아첸차대학’의 마리오 프레고니교수였다. 그곳에서 만난 스페인 친구를 따라 스페인도 가고 독일와인이 궁금해서 독일로도 발걸음을 옮기기도 했다. 점점 그의 혀는 붉은 와인의 미세한 떨림과 차이를 섬세하게 파악하고 구별할 수 있도록 단련되었다. 그에게 와인은 인생에서 가장 친한 동반자가 된 것이다.
2000년대 초반엔 재벌 총수가, 지금은 젊은층들이 단골
그런 그가 2009년 이제 달짝지근한 빵 번을 준다. 폭신폭신한 번을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그가 예전에 건네 준 와인 한잔들이 저절로 생각난다.
“저녁에는 여전히 와인이 있습니다. 하지만 쉐죠이는 빵도 맛볼 수 있는 곳이 되었지요. 여름이 되면 맥주를 팔 생각입니다”고 안씨는 말한다. 이런 그의 변신은 지금 와인산업과도 무관하지 않다. 올해 국세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2008년 술 소비량은 3.3% 증가했지만 소주와 맥주가 강세이고 와인은 작년 대비 12.5% 줄었다. 그가 말하는 쉐죠이의 역사는 어쩌면 우리 와인의 역사일지 모른다.
“2001년에는 기업의 회장님들이 주로 찾았죠, 그 이후로 기업의 임원들이나 외국여행을 많이 한 이들, 유학을 다녀온 이들이 오더라구요. 그 다음에는 40대 중반의 젊은 금융인들이 찾아왔습니다. 와인의 세계에 빠진 젊은 친구들도 하나둘 오더라구요, 요즘은 저가 와인만 나가는 편입니다.”
이곳을 찾았던 이들 중에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재벌가 기업인도 있고 지금 우리 와인계를 쥐락펴락하는 인사들도 있다. 70만~80만원대의 프랑스 그랑크뤼급 고급와인도 척척 팔렸다. 하지만 작년부터 고급와인을 찾는 이들은 줄고 와인과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는 이들이 늘자 그는 빵을 굽기 시작했다.

“신라호텔 출신 주방장을 모시고 음식을 만들어 봤는데, 좀 아닌 것 같았어요.” 이유는 그의 쉐죠이 철학 때문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쉐죠이는 와인이든 차든 무엇이든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와인집 쉐죠이는 이제 와인과 빵을 파는 곳인 동시에 문화적인 생산물을 만드는 공간(안씨가 저술 작업하는 공간)이 되었다. 그는 앞으로 외국에 있는 좋은 와인책을 번역할 생각이다. ‘착한’ 와인을 파는 샵도 운영할 생각이다.
또 2~3달 살 수 있는 여비를 마련해서 이탈리아 삐에몬테에서 머물다 올 생각이다. 이탈리아 삐에몬테 와인의 매력을 잊을 수가 없어서다. 와인을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와이너리 투어도 하고 싶단다.
그래도 잊지 못한 ‘옛사랑’, 영화에서 차용한 <쉐죠이>
그의 감성은 ‘쉐죠이’란 이름에서도 잘 나타난다. “쉐죠이는 ‘죠이의 집’이란 뜻인데, 누구는 쉐조이라고하고 누구는 수조이라고 해요, 발음이 어렵나봐요.”
쉐죠이란 이름은 영화 <팔 조이>(Pal Joey 1957년)에서 따왔다. 리타 헤이워스, 프랭크 시나트라, 킴 노박이 주연을 한 영화다. 영화 속에서 프랭크 시나트라는 리타 헤이워스에게 “네가 원하는 술집을 차려줄게”라고 이야기한다. 그 술집의 이름이 ‘쉐죠이’라고 안씨는 설명한다. 영화로 시작한 그의 인생이 와인과 만나는 지점이다.
이제 쉐죠이는 훌륭한 와인과 함께 빵과 커피의 향기까지 진하다. 인생을 살다보면 ‘변화’를 자신의 몸에 담아야 할 때가 온다. 그것은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다. 그저 내 앞에 놓인 ‘상황’이다. 좋은 것을 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재미있게 사는 방법 아닐까! 인생이란 파도처럼 오르락내리락 한다. 그래서 희망이 우리 곁에 있다. 쉐죠이의 희망을 담은 번을 잘근잘근 씹고 나서는 길이 그래서 가볍다. 내 인생의 번을 찾아 나서야겠다.
(02-555-8926/화이트와인 3만5천~10만원대, 샴페인 6만~16만원, 레드와인 3만원~20만원이상, 번 2천원, 커피 4천원, 맥주 3천~1만2천원)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영화하러 떠났다가 ‘새 사랑’ 만나 혀 단련
한국 와인의 역사…빵과 커피 향기 곁들여

내리쬐는 햇볕이 아스팔트를 달군다. 역삼동 좁은 골목을 걷다가 와인집 ‘쉐죠이’로 향한다. 삐걱, 문을 열고 들어간 대낮의 쉐죠이는 어둡다. 문턱을 넘자마자 향긋한 빵 냄새가 반긴다. 한 사내가 엉거주춤 일어나서 차림표를 내민다. 탱탱한 스파게티면 같은 파머머리가 고슬고슬 어깨까지 내려오고 언뜻 봐도 키는 180센티미터 넘어 보인다. 훤하다. 하얀 피부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자장가처럼 흘러나온다. 한눈에 사람을 사로잡는 힘이 있다.
샹송에 어울리는 목소리의 불문학도, 와인을 인생 동반자로
그가 커피 한 잔과 두 개의 번을 내온다. 번(bun)은 영국 요크셔지방 등에서 즐겨먹는 빵이다. 밀가루, 설탕, 달걀, 이스트, 버터로 만든다. 납작한 바닥과 둥근 모양, 단맛이 특징이다. 문지방을 넘자마자 코끝을 유혹한 향은 바로 이 번이었다.
사내의 이름은 ‘안준범’(41)이다. 그는 와인세계에서 알아주는 사람이다. 몇 달 전 <와인 읽는 CEO>란 책도 출간했다. 2000년부터 보드로와인아카데미, 경희대, 중앙대 등에서 와인에 대해 꾸준히 강의했다. 한때 매일유업에서 만든 와인수입업체 레뱅드매일에서 와인 셀렉션 업무를 맡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그의 이름을 치면 그와 관련된 뉴스가 수두룩하게 뜬다.

2001년 그의 와인집 쉐죠이를 열었을 때 한국에는 와인집이라고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와인에 대한 관심은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그것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 줄 사람은 드물었다. 그때 그가 해결사였다. 그의 이력 때문이었다.
그는 한국외국어대 불어학과를 다니다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 영화연극을 공부하기 위해서였지만 와인 세계에 더 깊이 빠졌다. 철학공부까지 마친 그는 <와인과 시>란 논문을 썼다. 이미 옛사랑(영화, 연극)에게서 마음이 떠난 그는 가슴 두근거리는 새로운 사랑(와인)을 찾아 길을 나섰다. 파리3대학과 소르본대학에서 학사학위 3개를 따고 와인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 론에 있는 포도주대학 ‘유니베리시떼 뒤 뱅’에서 와인을 공부했고 이탈리아로 넘어가 와인 스승을 만났다. ‘피아첸차대학’의 마리오 프레고니교수였다. 그곳에서 만난 스페인 친구를 따라 스페인도 가고 독일와인이 궁금해서 독일로도 발걸음을 옮기기도 했다. 점점 그의 혀는 붉은 와인의 미세한 떨림과 차이를 섬세하게 파악하고 구별할 수 있도록 단련되었다. 그에게 와인은 인생에서 가장 친한 동반자가 된 것이다.
2000년대 초반엔 재벌 총수가, 지금은 젊은층들이 단골

“저녁에는 여전히 와인이 있습니다. 하지만 쉐죠이는 빵도 맛볼 수 있는 곳이 되었지요. 여름이 되면 맥주를 팔 생각입니다”고 안씨는 말한다. 이런 그의 변신은 지금 와인산업과도 무관하지 않다. 올해 국세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2008년 술 소비량은 3.3% 증가했지만 소주와 맥주가 강세이고 와인은 작년 대비 12.5% 줄었다. 그가 말하는 쉐죠이의 역사는 어쩌면 우리 와인의 역사일지 모른다.
“2001년에는 기업의 회장님들이 주로 찾았죠, 그 이후로 기업의 임원들이나 외국여행을 많이 한 이들, 유학을 다녀온 이들이 오더라구요. 그 다음에는 40대 중반의 젊은 금융인들이 찾아왔습니다. 와인의 세계에 빠진 젊은 친구들도 하나둘 오더라구요, 요즘은 저가 와인만 나가는 편입니다.”
이곳을 찾았던 이들 중에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재벌가 기업인도 있고 지금 우리 와인계를 쥐락펴락하는 인사들도 있다. 70만~80만원대의 프랑스 그랑크뤼급 고급와인도 척척 팔렸다. 하지만 작년부터 고급와인을 찾는 이들은 줄고 와인과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는 이들이 늘자 그는 빵을 굽기 시작했다.

“신라호텔 출신 주방장을 모시고 음식을 만들어 봤는데, 좀 아닌 것 같았어요.” 이유는 그의 쉐죠이 철학 때문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쉐죠이는 와인이든 차든 무엇이든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와인집 쉐죠이는 이제 와인과 빵을 파는 곳인 동시에 문화적인 생산물을 만드는 공간(안씨가 저술 작업하는 공간)이 되었다. 그는 앞으로 외국에 있는 좋은 와인책을 번역할 생각이다. ‘착한’ 와인을 파는 샵도 운영할 생각이다.
또 2~3달 살 수 있는 여비를 마련해서 이탈리아 삐에몬테에서 머물다 올 생각이다. 이탈리아 삐에몬테 와인의 매력을 잊을 수가 없어서다. 와인을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와이너리 투어도 하고 싶단다.
그래도 잊지 못한 ‘옛사랑’, 영화에서 차용한 <쉐죠이>
그의 감성은 ‘쉐죠이’란 이름에서도 잘 나타난다. “쉐죠이는 ‘죠이의 집’이란 뜻인데, 누구는 쉐조이라고하고 누구는 수조이라고 해요, 발음이 어렵나봐요.”

이제 쉐죠이는 훌륭한 와인과 함께 빵과 커피의 향기까지 진하다. 인생을 살다보면 ‘변화’를 자신의 몸에 담아야 할 때가 온다. 그것은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다. 그저 내 앞에 놓인 ‘상황’이다. 좋은 것을 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재미있게 사는 방법 아닐까! 인생이란 파도처럼 오르락내리락 한다. 그래서 희망이 우리 곁에 있다. 쉐죠이의 희망을 담은 번을 잘근잘근 씹고 나서는 길이 그래서 가볍다. 내 인생의 번을 찾아 나서야겠다.
(02-555-8926/화이트와인 3만5천~10만원대, 샴페인 6만~16만원, 레드와인 3만원~20만원이상, 번 2천원, 커피 4천원, 맥주 3천~1만2천원)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