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사람 잣대는 ‘안동식혜 먹느냐 못 먹느냐’

박미향 2009.10.01
조회수 30125 추천수 0
안동 맛집들
무·고춧가루 넣어…안 먹어봤으면 말을 하지마!
헛제사밥·찜닭 ‘전국구’…안동국시는 정작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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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철없는 며느리가 추석명절에 시댁을 찾았다. 하지만 이 며느리는 추석 차례를 지내기도 전에 혼쭐이 났다. 사연인즉, 온 가족이 모여 송편을 빚고 있는데, 막내며느리 혼자 손 안에서 반죽을 조물거리고 있었다.  “아가, 뭘 만드느냐? 좀 보자”하고 시어머니가 말하자 막내며느리가 “아, 네 어머니”하고 손을 펴보였다. 며느리의 손에는 쌀로 송편 반죽으로 만든 작은 코끼리와 토끼가 있었다. “이제 콩으로 눈을 붙이려구요.” 기가 찬 시어머니는 눈에 쌍심지를 켰지만 가족들은 모두 크게 웃었다.
 
친구가 들려준 명절 경험담은 지금 생각해도 우습다. 요즘은 가족들이 일을 나눠서 하는 집이 많지만 예전 우리네 여인들은 할 일이 많았다. 특히 종갓집 맏며느리는 집안 행사나 명절 때마다 수천의 군사를 이끄는 장군처럼 진두지휘를 해야 했다. 작은 실수라도 있는 날에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발칙한’ 막내며느리에 눈에 쌍심지 켠 시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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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는 종가가 많다. 그래서 제사도 많다. 그렇다보니 생긴 재미있는 음식이 있다. 만약 죽고 난 다음에 제사상을 받는 기분이 어떤 것일까 궁금하다면 안동에 가서 ‘헛제사밥’을 먹어보면 된다.
 
‘헛제사밥’은 안동 사람들이 제사를 지낸 후에 음복을 하고 남은 음식들을 모아 만든 비빔밥이다. 이름에 ‘헛’이 들어가는 이유는 두 가지로 알려져 있다. 첫 번째는 서원이 많았던 안동에서 유생들이 제사음식을 앞에 두고 축과 제문을 지어 노는 거짓제사 놀이를 했는데 놀이가 끝나면 그 음식들을 나눠 먹었다고 한다. 두 번째 유래는 쌀이 귀해서 제사를 자주 지낼 수 없었던 평민들이 때로 헛제사를 지내고 그 핑계로 제사음식을 먹었다.
 
‘헛제사밥’은 담백한 각종 나물에 밥을 넣고 쓱싹쓱싹 비벼먹는 음식이다. 다른 비빔밥과 다른 점은 제사음식이 재료가 된다는 것, 비빌 때 들어가는 소스가 간장이라는 점이다. 제사상에 오른 듯한 전과 산적이 반찬이다. 그릇 안에 함께 넣어 비벼먹어도 좋다.
 
안동역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안동댐 주변에 ‘헛제사밥’을 맛볼 수 있는 곳이 있다. <터줏대감>과 <까치구멍집>이다. 너른 방과 한옥 문양의 창이 돋보인다. 넉넉하게 나오는 음식이 푸근하다. 음식점 앞에는 월영교라는 아름다운 다리가 있다.
 
‘안동식혜’도 다른 곳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식혜와 다르다. 식혜의 단맛과 물김치의 매운 맛이 어우러져 신기한 맛을 낸다. 아삭아삭 씹히는 무와 뭉클하게 터지는 밥알이 서커스 줄 그네를 타는 예인들처럼 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안동식혜’는 따끈한 찹쌀에 잘게 썬 무와 생강, 엿기름 내린 물을 섞는다. 고춧가루도 넣는다. 이것을 하룻밤 재우면 밥알과 다른 건더기가 삭는다. 일종의 유산균 음료인 셈이다. 저온에서 3일 정도 더 숙성시키면 유산균 수가 증가한다. 무가 들어가는 것도 특이하다. 그래서 ‘무식혜’라고도 부른다. 후루룩 마시기에는 국물 안에 건더기가 많다. 숟가락으로 떠먹는 것이 좋다. 안동사람들은 ‘안동식혜를 먹을 수 있느냐’를 가지고 고향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별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처음에는 맛이 독특해서 낯설지만 먹을수록 정이 드는 음식이 안동식혜다.
 
원래는 ‘안동네찜닭’…<선덕여왕>의 비담 같이 복잡 미묘한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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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난 사실은 서울 골목마다 보이는 ‘안동국시’가 안동에서는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안동국시는 밀가루에 콩가루를 넣어 얇게 밀어 만든 면을 장국에 넣고 끓이거나 국수 면을 삶아서 찬물에 헹구고 사리처럼 만들어서 국물에 말아 먹는 요리다. 후자를 건진국수라고도 한다. 건진국수는 길한 음식으로 알려져 있어서 안동사람들이 집에서도 자주 해먹었다. 안동사람들은 콩가루도 좋아해서 종류가 다른 떡에도 콩가루를 뿌릴 정도라고 한다. 국물은 멸치, 쇠고기, 꿩 등 고기를 우린 국물을 주로 사용했다. 하지만 정작 안동에는 안동국시 전문집이 거의 사라졌다. 프랜차이즈가 되면서 안동을 떠나 전국으로 흩어져버린 셈이라고나 할까.
 
‘안동찜닭’도 빼놓을 수가 없다. 수 년 전 갑자기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이곳저곳에 ‘안동찜닭’이 생겼다. 그래도 역시 그 음식이 처음 생긴 곳에서 먹는 맛이 최고다. 너른 접시에 넉넉하게 음식이 나온다. 다른 지역의 ‘안동찜닭’보다 당면이 많아 마치 당면비빔국수를 먹는 것처럼 느껴진다. 축축하게 엉클어진 머리카락처럼 꼬여있는 면을 한 가닥씩 풀면서 그 사이에 박혀있는 감자와 닭조각을 찾아내는 재미도 있다.
 
‘안동찜닭’은 특별한 날에만 먹는 음식이었다. 조선시대 안동에는 안(內)동네가 있었다고 한다. 이 동네는 요새 말로 부촌이었는데 특별한 날에만 ‘안동찜닭’을 만들어 먹었다. 그 음식을 바깥동네 사람들이 보고 ‘안동네찜닭’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간장에 조린 것이 드라마 <선덕여왕>에서의 선덕여왕 측근 비담처럼 복잡하고 미묘한 맛을 낸다.
 
명절은 전통이다. 그 전통이 이어져오는 큰 힘은 우리 음식에서 나온다. 수 백 년이 지나도 여전히 어머니의 손에서 어머니의 손으로 이어져오는 우리 음식이 우리들이 힘이다.
   
글·사진 박미향  <한겨레> 맛담당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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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 기자
한겨레신문에서 음식문화에 관한 다양한 기사를 쓰고 있다. 2000년에 직장인들의 야식을 주제로 한 연재물 '밤참'을 시작으로 먹을거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인생이 있는 식탁> 등 4권의 음식 관련 책을 냈다. MBC <여성시대> 등에 출연해 맛난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체력과 품 넓은 열정을 재산 삼아 맛과 이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문화 정착에 자신의 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행복의 시작은 밥상이 출발이라고 믿는다.
이메일 : mh@hani.co.kr       트위터 : psols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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