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참고서 생각나는 ‘흐린 기억’ 속 낯익은 이름

박미향 2009.11.12
조회수 10640 추천수 0
동아정과
자다 눌린 형 머리통 모양 동아에 꿀 넣어 졸인 과자
꼬막껍질가루로 ‘슥슥’ 문질러 ‘뚝딱’하면 ‘아삭’한 맛

 
 
Untitled-10 copy.jpg잊혀지는 것은 슬프다. 잊는 것도 아프다. 꼭 사랑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살다 보면 어느 한쪽의 상황에 맞닥뜨릴 때가 있다. 두 가지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안타까운 일일까!

 
사람들 틈에서 ‘내’가 사라지는 순간, 반대로 ‘내가 아끼던 것’들이 온데간데 없어지는 순간, 기억을 아무리 하려 해도 찾을 수 없다. 마음에 품었던 흔적들이 얇은 모시적삼 해지듯 사라진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잊혀지는 것보다 이것이 더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까!
 
의식주 백과사전 <규합총서>에도 실린 인기 최고 간식
 
음식에도 이런 안쓰러움을 간직한 것이 있다. 애써 기억하려고 하나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뿌연 영상만 떠오르는 음식, 도무지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 음식.
 
‘동아전과’가 그런 음식이다. ‘동아전과’하면 퍼뜩 참고서를 떠올리는 이들도 있겠지만, 이것은 책이 아니라 음식 이름이다. ‘동아정과’나‘동과정과’라고도 하고 ‘동아전과’라고도 부른다. 동아에 꿀을 섞어 넣어 졸인 우리네 과자류 음식이다.
 
Untitled-9 copy.jpg‘동아’가 낯설다. 전래동화 <해님 달님>에 나오는 동아줄의 ‘동아’가 아니다. 동아는 은은한 녹색을 띈 박과식물이다. 식용으로 사용되는 열매의 모양은 원형이나 타원형이다. 늘어지게 자다가 눌린 우리 형 머리통 같다.
 
이 이름이 낯선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재배하는 곳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식재료를 사용해 만들었던 우리 옛 음식들, 동아김치, 동아차, 동아찜, 동아선 등을 볼 수가 없다. 그 안에 동아정과도 있다. 동아정과는 <규합총서>에 그 만드는 법이 나올 정도로 조상들에게는 인기가 있었던 간식이다.
 
이 동아정과를 지금까지 ‘잊지 않고’ 만들고 있는 이가 있다. 안송자(80)할머니. 안 할머니는 전라남도 나주 다도면 풍산리 도래마을에 산다. 이 마을은 풍산 홍씨 한의가 조선 중종 때 터를 잡은 곳이다. 안할머니는 고향인 함평 나상면에서 이 가문 23대손에게 22살에 시집을 갔다. 할아버지는 나주 금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임했다.
 
손에서 손타고 내려온 맛, 이제 누가 기억하려나
 
Untitled-8 copy 2.jpg

시집 온 첫날부터 시어머니는 집안 음식을 가르쳐주었다. 어머니들의 손을 타고 이어져온 가문의 비법이었다. 안할머니도 큰며느리에게 집안 음식 비법을 전수하고 싶지만 쉽지는 않다고 말한다.
 
24년 간 이 동네 부녀회장을 할 정도로 열정과 기백이 남다른 안할머니는 지금도 동아정과 만드는 법을 손수 시범보인다. 안할머니의 손에서 뚝딱 만들어지는 동아정과가 신기할 따름이다. 가장 희한한 것은 곱게 간 꼬막껍질가루를 동아에 문지른다는 점이다. 꿀을 채우는 음식이라 그저 달콤하기만 하려니 했건만, 시커먼 가루를 바르는 모양새가 신기하다. <규합총서>에는 ‘불 꺼진 재’를 사용했다고 나온다.
 
구운 조개껍질가루를 넣는 이유는 “동아의 수분을 제거”하기 위해서란다. 전통음식연구가 양영속씨가 말한다. “동아는 순창, 나주에서 많이 재배합니다. 예전에는 짚이나 콩대를 태워 만든 가루를 많이 사용했습니다.”이 과정을 거쳐야 동아정과는 더 아삭아삭한 맛이 난다.
 
Untitled-7 copy 2.jpg정성을 다해 동아정과를 보여주는 안할머니는 정열의 ‘열혈천사’다. 이 음식을 지키기 위해 집 앞에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동아를 키운다. 10월이면 머리통 두 배만한 동아가 주렁주렁 열린다. 2000년에는 순천 낙안읍성에서 열린 ‘남도음식문화 큰잔치’에서 이 동아정과 요리로 전통음식부문 대상을 타기도 했다.
 
음식은 기억이다. 우리가 어려웠던 시절 먹었던 죽이나 길거리 음식을 최고로 맛있던 것으로 여기는 이유는 그 시절 기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세상에 남기려고 하는 ‘동아정과 이야기’만은 우리 마음이 잊지 못한다. 왜냐! 정열의 안할머니가 자신의 가슴 속에서 동아정과를 지우지 않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비법을 따라가 보자.
 
 
1. 꼬막껍질을 불 땔 때 넣어 굽는다. 2~3번 더 굽고 돌절구로 빻는다. 회색빛 고운 가루가 만들어진다. 할머니는 제사나 추석 때 사용하고 남은 껍질을 쓰신단다.
 
2. 이 가루를 체에 거른다. 집 앞마당에 있는 동아를 딴다.
 
3. 동아를 톱으로 자른다. 할머니는 “큰 톱으로 자르는 것은 비틀어지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4. 껍질을 잘라 내고 흰색 알맹이를 1cm x 2.5cm x 4cm 크기로 자른다. “도톰하게 자르면 된다”고 말한다.
 
5. 사와가루(구운 꼬막껍질 간 가루)를 동아조각에 고루 뿌린다.
 
6. 마루에 24시간 둔다.
 
7. 시간이 지난 후 동아를 눌렀을 때 살짝 물기가 나올 때쯤  꺼내서 여러 번 씻는다. 1시간 동안 물에 담가둔다.
 
8. 솥에 동아를 담고 찰박찰박 찰 정도 물을 붓고 엿을 조금 넣는다.
 
9. 5~6시간 중간 불에 끓인다. “옛날에는 땔감으로 달였는데 지금 가스레인지가 나와 좋아”할머니는 웃는다.
 
10. 자글자글 끓는 정도를 확인하고 흰색 엿을 넣는다. 호박엿 색으로 변할 때까지 젓는다. “엿을 너무 많이 넣으면 딱딱해진다”고 할머니는 말한다. 완성되면 엿을 동아정과 위에 더 부어 냉장고에 보관한다. “1년까지도 보관할 수 있다”고 할머니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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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사진 박미향 <한겨레>맛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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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 기자
한겨레신문에서 음식문화에 관한 다양한 기사를 쓰고 있다. 2000년에 직장인들의 야식을 주제로 한 연재물 '밤참'을 시작으로 먹을거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인생이 있는 식탁> 등 4권의 음식 관련 책을 냈다. MBC <여성시대> 등에 출연해 맛난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체력과 품 넓은 열정을 재산 삼아 맛과 이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문화 정착에 자신의 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행복의 시작은 밥상이 출발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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