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대신 선택한 ‘10평’…작은 공간 큰 행복

박미향 2009.11.28
조회수 30966 추천수 0
<브리스토트>와 <올리브트리>
‘질풍노도’의 20·30대, 거친 바람 뚫은 용기
어울리지 않는 자장면-와인으로 형식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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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평은 작아 보인다.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싶다. 하지만 그 공간의 주인에 따라선 참 큰 면적이 되기도 한다. 가난한 신혼부부는 10평을 뜨거운 사랑의 보금자리로 만들고, 죄수는 삶을 반성하는 고해소로 바꾼다. 충정로역에 있는 <브리스토트>의 주인 함모란(28)씨와 서초동 <올리브트리>의 정일권(35)씨에게 10평은 자신의 삶을 펼치는 특별한 장소이다.
 
“날 찾아오는 이들에게 최선다하고 싶어“
 
함모란씨는 앳된 얼굴을 한 젊은 처자다. 여느 아가씨들처럼 맛난 먹을거리를 찾아 방랑하고 예쁘고 아기자기한 소품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는 또래 친구들처럼 입사지원서를 들고 기업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것은 용감한 창업이었다.
 
‘88만원 세대’가 선택할 수 있는 기업도 그리 많지 않은 세상이다. 자신의 소질을 맘껏 발휘하는 곳을 찾기란 더욱 힘들다. 그는 이처럼 혹독한 도시의 거리에서 가슴에서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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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2호선과 5호선 충정로역 사이 좁은 골목에 자신의 집 <브리스토트>를 열었다. 처음엔 커피만 내놓았다. “7개월쯤 지나자 손님들이 먹을거리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해서 음식을 내기 시작했다. 찾아가는 인간관계보다 찾아오는 인간관계를 꿈꾸던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모란이란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주셨다. 모란꽃처럼 예쁘게 크라는 뜻이 담겨 있단다. 그에게 가족은 험한 세상을 헤쳐가는 힘이다. “형제가 셋인데 배우자들, 아이들까지 모두 함께 살아요. 아홉 식구죠.” 그 아홉 식구는 매주 그가 만든 음식을 품평해주는 시식단이다. 노인부터 중, 장년, 아이들까지 다양한 입맛을 가진 이들에게 좋은 평점을 받으면 바로 <브리스토트>의 차림표에 들어간다.
 
최근엔 와인도 맛볼 수 있게 해준다. 와인은 독학을 했다. 한 번 잡은 와인관련 서적은 5~6번 읽는다. 독학한 이유는 “거친 형식에 치중하는”와인문화가 싫어서다. 그는 와인 맛을 시험하기 위해 한 병을 따면 반잔 정도 마신다. 그럼 나머지 와인들은? 바로 손님들에게 서비스된다. 운 좋으면 와인이 공짜다. 3년 전 한적하기만 했던 이곳은 이제 서둘러 가지 않으면 자리가 없는 곳이 되었다. 그의 소망은 오로지 한 가지, “이곳에서 연애해서 결혼한 분이 있는데 그분들이 아이를 낳고도 여전히 남아 있어 다시 찾는 곳”이 되었으면 한다. 친구들은 그를 많이 부러워한다. 하지만 그처럼 용감한 선택을 하기란 쉽지 않다. 20대는 거친 모래 바람 속에서 짚신 한 켤레 지고 길을 떠나야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다. (음식 1만원~1만3천원, 커피 3천원~4천원, 와인 3만원~10만원. 02-362-5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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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자취 경력으로 손님 입맛 사로잡아…3만3천원 와인도 인기

 
서초동 정일권(35)씨는 30대에 어려운 선택을 했다. 7년 간 다닌 직장을 올해 그만두고 와인바 <올리브트리>를 인수했다. <올리브트리>는 2005년 문을 연 후에 와인마니아들 사이에서 ‘자장면 있는 와인집’으로 소문이 난 집이다. 들머리를 밟고 안으로 들어서면 양쪽 벽에 이곳을 찾은 이들의 환한 사진이 수백 장 걸려 있다. 사진들 아래에는 ‘자주 올게요, 너무 좋아요’, ‘오늘 자장면 지대로네요’ ‘OO과 영원히 사랑하게 해주세요’ 따위의 글들이 굵게 써 있다.
 
그에게 <올리브트리>는 열정의 황혼에서 올라탄 막차다. “언젠가 제 가게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이 더 들면 열정이 사라질까 두려웠습니다.”가족의 반대가 심했다. 심지어 점집에 끌고 가서 안 좋은 소리까지 듣게 했다. 하지만 그의 꿈을 꺾을 수는 없었다.
 
<올리브트리>에는 그만의 감각으로 태어난 것들이 곳곳에 박혀 있다. 대표적인 것이 낮에 커피와 라면이 있는 점. “이곳에 30대 남자 직장인들이 많더라구요, 그들을 위해 라면을 끓여 군대 그릇에 담아 내옵니다.” 차림표에 먹을거리도 늘었다. ‘해물크림파스타’ ‘통감자구이’ ‘케사디야’ 등등. 23살 때 고향 전주에서 올라와 자취생활만 12년째다. 자취를 하면서도 음식을 사먹지 않고 늘 해먹었던 그의 손맛이 살아 있다. 와인 목록에도 희한한 게 들어 있다. ‘3만3천원 와인’ 이 목록에 있는 와인은 모두 ‘3만3천원’균일가다. 가격은 같지만 칠레,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고향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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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의 ‘자장면’은 유별나다. ‘자장면’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조금 어설프지만 즐거움을 주는 맛이다. 인스턴트 짜파게티에 이 집만의 향을 넣어 만들었다. “가게가 작아서 한 사람만 주문해도 향이 금세 퍼집니다. 다른 분들도 해달라는 주문이 밀려들지요”
 
그의 목표는 ‘올리브트리’ 이름을 단 와인프랜차이즈를 여러 곳에 여는 것이다. 그는 ‘질풍노도’의 20대를 보내고 다른 삶을 선택했다. 그의 인생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벽에 걸린 사진 덕을 많이 봐요. 사진 속 사람들이 이곳을 찾은 이들을 향해 웃고 있죠.”(음식 5천원~2만5천원, 와인 3만3천원~20만원. 02-525-6009)
 
글 사진 박미향 <한겨레>맛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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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 기자
한겨레신문에서 음식문화에 관한 다양한 기사를 쓰고 있다. 2000년에 직장인들의 야식을 주제로 한 연재물 '밤참'을 시작으로 먹을거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인생이 있는 식탁> 등 4권의 음식 관련 책을 냈다. MBC <여성시대> 등에 출연해 맛난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체력과 품 넓은 열정을 재산 삼아 맛과 이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문화 정착에 자신의 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행복의 시작은 밥상이 출발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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