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내린 비린 맛, 그 맛도 모르고…

박미향 2011.01.20
조회수 13029 추천수 0
어선에서 먹은 생멸치 조림 맛, 도심에서 만나
정답만 말하던 언니 같은 후배, 맛에서는 오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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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자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재작년의 일이다. 배를 탄다는 사실만으로 두려움이 엄습했다. 취재 길에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지구를 침공한 외계생물체를 만나러 가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오래전 속초에서 곰치잡이 배를 탔던 기억 탓이다. 새벽 5시 겨울바다의 곰치 배는 적들에 포위된 우주선 같았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온몸이 흔들거리고 속이 메스꺼웠다. 그때의 괴로웠던 기억 때문에 남해의 멸치잡이 배 취재도 공포로 다가왔다.
 

텔레비전 프로 취향은 같은데…
 
다행히 18톤인 멸치잡이 배에서는 멀미에 시달리지 않았다. 대신 취재 내내 온몸에 갓 잡은 비릿한 멸치들이 딱정벌레처럼 달라붙어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나는 커다란 멸치로 변했다. 정오가 되자 기적이 일어났다.

 
어부는 갓 잡은 통통한 멸치들을 고춧가루와 갖은 양념으로 졸이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밥 위에 얹어주었다. ‘생멸치조림’은, 맛난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미련한 인간에게는 신이 하사한 선물이었다. 노동의 끝에 먹는 밥은 최고였다. 도시에 돌아와서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구정숙추어탕’에서 그 ‘놈’을 만났다. ‘생멸치 쌈밥’이 식탁에 나오는 순간 ‘앗, 그 배의 그 맛이다’라는 소리가 뱃속에서 들렸다. 쌈 채소와 갖은 양념으로 졸인 ‘생멸치조림’이었다. 비릿한 맛도 살아있었다.
 ‘생멸치조림’보다 더 반가운 것은 식탁 앞에 마주앉은 후배 ㄱ이었다. ㄱ과의 인연은 <엑스파일>로 시작한다. 그와 나는 로맨스도 없는 기괴한 이야기투성인 <엑스파일> 시리즈를 방송 초창기부터 좋아했다. 같은 것을 좋아한다는 점은 강한 끈이 된다.

 
요즘 그 후배가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남편 때문이다. ‘남편’이 등장하면 왠지 <사랑과 전쟁>이 생각난다. ㄱ의 고민은 그런 종류가 아니다. 그의 남편은 노조위원장이다. 스마트폰이 길을 찾아주고 고화질 시시티브이가 범인을 잡는 이 시대에 노조를 와해시키려는 회사의 탄압은 예전과 다름이 없다. 계략은 더 치밀하고 지능적이다.
 

노조위원장 남편에게 “그럴려면 집에 들어앉아!”
 
마음고생이 심한 그의 남편은 마음 편히 백기를 들까도 생각했다. 그때마다 ㄱ이 마음을 잡아주었다. “그런 생각할 거면 차라리 집에서 들어앉아! 다 때려치워!” ㄱ은  남편이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괴로워 하는 걸 보는 게 더 힘들 것 같다고 했다. 아내의 강한 의지는 큰 힘이 되었다. ㄱ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격려하고 있었다.

 
후배지만 스승 같은 ㄱ. 철딱서니 없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에게 늘 언니처럼 인생에서 중요한 국면마다 아주 상식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그가 제시한 해답은 평범했지만 늘 정답이었다. 가족만큼 아끼고 사랑하는 후배는 내게 든든한 인생의 버팀목이다. 은은한 봄바람 같은 후배, 죽을 때까지 함께 술 마시고 사랑할 후배, 건투를 빈다.
‘생멸치조림’이 힘을 됐어야 할 터인데. “언니, 근데 맛있는데 난 좀 비리다.” 흐흐! 비린 맛이 생명이야! (‘구정숙추어탕’는 구정숙(63)씨가 20년 전 고양시에서 운영하다가 10년 전부터 서울 신도림에서 터를 잡은 집이다. 여의도 ‘구정숙추어탕’집은 2호점인 셈이다. 신도림점 02-2631-0993/여의도 02-784-0341)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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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 기자
한겨레신문에서 음식문화에 관한 다양한 기사를 쓰고 있다. 2000년에 직장인들의 야식을 주제로 한 연재물 '밤참'을 시작으로 먹을거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인생이 있는 식탁> 등 4권의 음식 관련 책을 냈다. MBC <여성시대> 등에 출연해 맛난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체력과 품 넓은 열정을 재산 삼아 맛과 이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문화 정착에 자신의 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행복의 시작은 밥상이 출발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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