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일미 돈부리’의 규동
소바집하다 망한 아버지 빚, 요리로 갚기 나서
대 이은 ‘감’ 바탕으로 ‘독특한 소스’ 얹어 승부
“너만의 맛을 만들어!” 필립 K.딕의 SF소설은 독특하다. 그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로,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는 영화 ‘토탈리콜’(1990)로 만들어졌다. 그의 단편집 <죽은 자가 무슨 말을>를 읽으면 깜짝깜짝 놀란다. 그의 소설은 날카로운 사냥꾼의 칼날처럼 섬뜩하고 사막 한가운데서 빛나는 보석처럼 영롱하다.
감독 팀 버튼의 영화 <유령신부>(2005)도 그 독특함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든다. 신부가 유령일수가! <화성침공>(1996)에 나오는 외계인은 호두 모양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그의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다. 오래 전 쓰였던 소설과 영화가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있는 이유는 오직 “너만의 맛”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너만의 맛”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기술일지 모른다. 신이 모두에게 선물한 내 안의 “너만의 맛”은 있다. 그것을 찾는 이가 세상살이에 성공하는 것이 아닐까!
도끼눈 사채업자를 웃게 만든 바로 그 맛
만화 <천하일미 돈부리>(다카쿠라 미도리 지음)의 주인공 쿠라타 슈운이 찾아 나선 것도 “너만의 맛”이다. “너만의 맛을 만들어”는 만화 1권에서 주인공 슈운에게 친구가 건네는 격려의 말이다. 이 만화의 배경은 돈부리집이 아니다. 소바집이다. 주인공 슈운의 아버지는 몇 대째 내려오는 소바집의 주인. 하지만 손을 다친 후 더 이상 면을 반죽할 수 없게 되자 소바집은 점점 기운다. 아버지는 설상가상 망한 친구의 연대보증까지 섰다. 그 빚까지 떠안은 이 집은 정말 ‘큰일’이 났다.
악당 사채업자 아오누마 토모히코의 폭력마저 견뎌야 했다. 만화답게 극적인 일들이 벌어진다. 천하 미식가인 도모히코가 슈운의 타고난 맛에 대한 균형감을 높이 사서 요리로 빚을 갚게 한다. 슈운은 그의 입맛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럼 아버지의 맛을 이어 소바를! 아니다. 슈운은 좋아하는 돈부리로 승부를 시작한다.
돈부리는 ‘돈부리메시’의 준말인데 밥 위에 무언가를 얹어 먹는 요리를 말한다. ‘동’이라고 줄여 부르기도 한다. 쇠고기를 얹으면 ‘규동’, 닭고기와 달걀을 얹으면 ‘오야코동’, 돼지고기로 만든 돈까스를 올리면 ‘가츠동’이 된다. 일본에서는 가정에서 쉽게 만들어 먹는 음식이다. 거리만 나서도 많은 음식점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 음식환락가(?)에서도 돈부리집이 인기다. 소문 난 집은 줄을 한 시간 넘게 서야 한다. 사람들을 쑥쑥 빨아들이는 매력이 있다.
사채업자 도모히코가 슈운에게 첫 주문한 돈부리는 ‘규동’이다. 만화에는 규동의 역사를 일본 메이지 시대의 규나베(일본 전골요리)에서 찾는다. 메이지시대에 서민들은 규나베를 먹고 남은 국물을 밥에 부어 먹었다. 규동의 시작이다.
요리라고는 해본 적 없는 슈운, 그가 첫 번째 찾은 “너만의 맛”은 양파에서 발견한 맛이었다. 슈운은 몇 대째 내려오는 집안의 소바 장국을 덮밥에 넣었다. 맛은 실패였다. 아무리 훌륭한 소스도 다른 재료들과 잘 어울릴 수 없다면 먹을거리가 아니라 쓰레기다. 소바 장국의 맛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맛이다. 다른 이의 맛으로 “너만의 맛”을 낼 수는 없다. 드디어 사채업자 도모히코에게 규동을 선보이는 날. “구운 두부와 양파도 씹는 느낌이 좋고 속까지 맛이 고루 스며들어 있어요.” 도모히코의 친구가 찬사를 보낸다. 이때 도모히코는 “쿠라타 슈운 소년의 규동은 이런 맛이 아닐 텐데” 하고 도끼눈을 뜬다.
12시간 볶고 또 볶고 우아한 달콤함이 코끝까지
바로 이때 슈운이 들고 들어온 황금빛 소스가 규동에 뿌려진다. 도끼눈이 왕방울만큼 커지고 혀와 이 사이로 침이 뚝뚝 흐른다. “이 은은하고 달콤함은 어디에서 왔을까? 벌꿀이나 과일의 단맛도 아니다. 단순한 설탕의 단맛이 아냐.” 규동 안에 쇠고기의 존재감을 왕궁처럼 세우는 소스, 이 소스는 슈운이 찾은 “너만의 맛”이다.
이 소스는 양파와 슈운의 땀과 정성이 합체한 것이다. 양파 30개를 12시간 볶아 만들었다. 아 12시간! 죽는다. 팔이 빠진다. 양파는 날 것으로 먹으면 눈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맵지만 볶으면 세상 이보다 우아한 달콤함은 없다. 변신의 귀재, 양파! 양파는 영양만점의 식재료이기도 하다. 기원전 3000년 경으로 추정되는 이집트 분묘의 벽화에는 피라미드를 쌓는 일꾼들에게 양파를 먹인 기록이 있을 정도다. 슈운의 소스는 맛과 영양,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작가 다카쿠라 미도리는 여성이다. 그가 그린 이 만화는 소년잡지에 연재했었다. 일본의 요리 만화들은 남성작가의 손에 그려진 것이 많다. 그래서 이 만화가 더 독특하다. 여성 작가답게 주인공 슈운은 동글동글한 얼굴과 큰 눈, 하염없이 귀엽다. 슈운의 친구 다케미야 아야의 예쁜 옷들은 순정만화 속 주인공 같다. 현재 8권으로 완결되었다.
규동은 마치 지구의 지층을 뚫는 느낌이다. 숟가락으로 쇠고기와 밥을 차례로 뚫다보면 눅진한 향이 피어올라 코를 간지럽힌다. 혀 끝에 닿는 순간 온 몸이 간질간질 웃음이 퍼진다. 흐뭇한 마음이 평화로 이끈다. 돈부리용 냄비는 모양이 재미있다. 한 손으로 가볍게 들 수 있다. 마치 큰 국자를 보는 듯하다. 요즘 일본 요리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돈부리용 냄비를 파는 곳이 늘고 있다.
우리 모두 “너만의 맛”을 만들어보자. 슈운의 맛과는 또 다른, 필립 K. 딕의 상상력과 또 다른, 팀 버튼의 색감과 또 다른!
글 사진 박미향 <한겨레> 맛담당 기자, 요리 김정은(배화여자대학 전통요리학과 교수)
소바집하다 망한 아버지 빚, 요리로 갚기 나서
대 이은 ‘감’ 바탕으로 ‘독특한 소스’ 얹어 승부

감독 팀 버튼의 영화 <유령신부>(2005)도 그 독특함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든다. 신부가 유령일수가! <화성침공>(1996)에 나오는 외계인은 호두 모양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그의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다. 오래 전 쓰였던 소설과 영화가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있는 이유는 오직 “너만의 맛”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너만의 맛”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기술일지 모른다. 신이 모두에게 선물한 내 안의 “너만의 맛”은 있다. 그것을 찾는 이가 세상살이에 성공하는 것이 아닐까!
도끼눈 사채업자를 웃게 만든 바로 그 맛
만화 <천하일미 돈부리>(다카쿠라 미도리 지음)의 주인공 쿠라타 슈운이 찾아 나선 것도 “너만의 맛”이다. “너만의 맛을 만들어”는 만화 1권에서 주인공 슈운에게 친구가 건네는 격려의 말이다. 이 만화의 배경은 돈부리집이 아니다. 소바집이다. 주인공 슈운의 아버지는 몇 대째 내려오는 소바집의 주인. 하지만 손을 다친 후 더 이상 면을 반죽할 수 없게 되자 소바집은 점점 기운다. 아버지는 설상가상 망한 친구의 연대보증까지 섰다. 그 빚까지 떠안은 이 집은 정말 ‘큰일’이 났다.
악당 사채업자 아오누마 토모히코의 폭력마저 견뎌야 했다. 만화답게 극적인 일들이 벌어진다. 천하 미식가인 도모히코가 슈운의 타고난 맛에 대한 균형감을 높이 사서 요리로 빚을 갚게 한다. 슈운은 그의 입맛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럼 아버지의 맛을 이어 소바를! 아니다. 슈운은 좋아하는 돈부리로 승부를 시작한다.

최근 우리나라 음식환락가(?)에서도 돈부리집이 인기다. 소문 난 집은 줄을 한 시간 넘게 서야 한다. 사람들을 쑥쑥 빨아들이는 매력이 있다.
사채업자 도모히코가 슈운에게 첫 주문한 돈부리는 ‘규동’이다. 만화에는 규동의 역사를 일본 메이지 시대의 규나베(일본 전골요리)에서 찾는다. 메이지시대에 서민들은 규나베를 먹고 남은 국물을 밥에 부어 먹었다. 규동의 시작이다.
요리라고는 해본 적 없는 슈운, 그가 첫 번째 찾은 “너만의 맛”은 양파에서 발견한 맛이었다. 슈운은 몇 대째 내려오는 집안의 소바 장국을 덮밥에 넣었다. 맛은 실패였다. 아무리 훌륭한 소스도 다른 재료들과 잘 어울릴 수 없다면 먹을거리가 아니라 쓰레기다. 소바 장국의 맛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맛이다. 다른 이의 맛으로 “너만의 맛”을 낼 수는 없다. 드디어 사채업자 도모히코에게 규동을 선보이는 날. “구운 두부와 양파도 씹는 느낌이 좋고 속까지 맛이 고루 스며들어 있어요.” 도모히코의 친구가 찬사를 보낸다. 이때 도모히코는 “쿠라타 슈운 소년의 규동은 이런 맛이 아닐 텐데” 하고 도끼눈을 뜬다.
12시간 볶고 또 볶고 우아한 달콤함이 코끝까지
바로 이때 슈운이 들고 들어온 황금빛 소스가 규동에 뿌려진다. 도끼눈이 왕방울만큼 커지고 혀와 이 사이로 침이 뚝뚝 흐른다. “이 은은하고 달콤함은 어디에서 왔을까? 벌꿀이나 과일의 단맛도 아니다. 단순한 설탕의 단맛이 아냐.” 규동 안에 쇠고기의 존재감을 왕궁처럼 세우는 소스, 이 소스는 슈운이 찾은 “너만의 맛”이다.
이 소스는 양파와 슈운의 땀과 정성이 합체한 것이다. 양파 30개를 12시간 볶아 만들었다. 아 12시간! 죽는다. 팔이 빠진다. 양파는 날 것으로 먹으면 눈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맵지만 볶으면 세상 이보다 우아한 달콤함은 없다. 변신의 귀재, 양파! 양파는 영양만점의 식재료이기도 하다. 기원전 3000년 경으로 추정되는 이집트 분묘의 벽화에는 피라미드를 쌓는 일꾼들에게 양파를 먹인 기록이 있을 정도다. 슈운의 소스는 맛과 영양,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작가 다카쿠라 미도리는 여성이다. 그가 그린 이 만화는 소년잡지에 연재했었다. 일본의 요리 만화들은 남성작가의 손에 그려진 것이 많다. 그래서 이 만화가 더 독특하다. 여성 작가답게 주인공 슈운은 동글동글한 얼굴과 큰 눈, 하염없이 귀엽다. 슈운의 친구 다케미야 아야의 예쁜 옷들은 순정만화 속 주인공 같다. 현재 8권으로 완결되었다.
규동은 마치 지구의 지층을 뚫는 느낌이다. 숟가락으로 쇠고기와 밥을 차례로 뚫다보면 눅진한 향이 피어올라 코를 간지럽힌다. 혀 끝에 닿는 순간 온 몸이 간질간질 웃음이 퍼진다. 흐뭇한 마음이 평화로 이끈다. 돈부리용 냄비는 모양이 재미있다. 한 손으로 가볍게 들 수 있다. 마치 큰 국자를 보는 듯하다. 요즘 일본 요리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돈부리용 냄비를 파는 곳이 늘고 있다.
우리 모두 “너만의 맛”을 만들어보자. 슈운의 맛과는 또 다른, 필립 K. 딕의 상상력과 또 다른, 팀 버튼의 색감과 또 다른!
| |
글 사진 박미향 <한겨레> 맛담당 기자, 요리 김정은(배화여자대학 전통요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