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모한 결심

이욱정 2011.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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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들로드 이욱정PD의 '르 코르동 블뢰'생존기<1>
"나만의 인생 레시피 만들자" 영국 요리학교 합격 

 
  한 방송국 피디가 있었다. 요리를 좋아했다. 수저를 들 때마다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떨렸다. 2008년 세상의 맛을 향해 카메라를 들었다. 한 알의 밀이 국수가 되어 세계인의 식탁을 주유하는 여행을 따라나섰다. 2년간 10개 나라를 다녔다. 그가 제작한 프로그램은 <인사이트 아시아-누들로드>. 2008년 12월부터 2009년 3월까지 <한국방송>의 전파를 탔다. 피디는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카메라 대신 칼과 도마를 잡았다.  <누들로드>를 만든 이욱정 피디는 지난해 ‘르 코르동 블뢰’ 런던캠퍼스에 입학했다. 요리사를 꿈꾸는 젊은이들과 지글지글, 보글보글 끓는 런던의 주방에서 고군분투중이다. 그의 처절하지만 달콤한 요리학교 생존기가 2주에 한번씩 펼쳐진다. 그의 유학생활을 담은 미니다큐는 ’www.kbs.co.kr/cook’에서 볼 수 있다. -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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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어느 날, 한밤중에 홀로 <누들로드> 편집실에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물이 막 끓기 시작한 2.5ℓ 냄비야, 우왕좌왕 망설이다 보면 펄펄 끓던 물은 어느새 증발해버릴 것이고 영원할 것 같던 불꽃도 사라져버리겠지, 죽이든 밥이든 걸쭉한 리소토든 더 늦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재료를 있는 대로 집어넣고 무언가 나만의 요리를 시작해야 돼.’ 품속에 오랫동안 숨겨둔 나만의 인생 레시피는 말 그대로 요리사가 돼보는 것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음식을 촬영하고 관련 자료를 공부했지만 정작 내 손으로 멋있게 만들 수 있는 요리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마치 야구전문 피디가 글러브 한번 만져보지 않은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들의 주방에 뛰어들어 내 두 손으로 주물러보고 잘라보고 익혀보고 싶었다. 그리고 얼마 뒤 나는 바다 건너 요리학교에 무작정 지원서를 냈고(물론 아무도 모르게) 운 좋게도 합격했다. 정말 ‘말 그대로’ 나만의 요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무모했기 때문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프로듀서질 외에는 다른 재주라곤 털끝만치도 없는 내가, 멋진 요리를 먹는 것은 섹스보다 황홀한 경험이라고 떠벌리면서도 막상 조리 경험이라고는 회사 야유회 요리 경력이 전부인 내가, 멀쩡히 잘 다니던 방송사에 휴직계를 던지고 전세금과 마이너스 통장까지 톡톡 털어 런던의 직업요리학교로 무작정 떠났으니 말이다. 이런 속 내용을 잘 아는 지인들은 나의 앞날을 적잖이 걱정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의심했다. “쟤가 무슨 믿는 구석(강남의 숨겨둔 부동산 같은 거 말이다)이 있겠지.” 하지만 실상 나의 믿는 구석은 설마 요리학교 다니면서 굶기야 하겠냐는 태평한 현실 판단과 무작정 저지르고 보자는 평소의 도전정신(투기심리라 불러도 좋다)뿐이었다.
 

‘나만의 요리’ 위해 전세금 털어 유학 떠나
 
아무튼 정신을 차리니 세계 최고의 요리학교 ‘르 코르동 블뢰’(Le Cordon Bleu) 런던캠퍼스 앞이었다. 입학 첫날 아침 8시. 학교 문이 아직 열리기도 전, 런던 시내 한복판의 5층 건물 입구는 이미 신입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사 간 동네의 고등학교 입학식에 온 16살 소년이라도 된 기분이랄까! 뻘쭘하게 서 있는 다른 학생들도 모두 상기된 표정이 역력했다. 영국, 포르투갈, 헝가리, 타이, 말레이시아, 중국, 브라질 등. 국적도 어지럽게 다채롭지만 나이도 천차만별이었다. 고등학교 갓 졸업하고 온 애송이에서 그만한 큰애가 있어 보이는 아줌마까지.

 
그 틈에서 어색하게 서 있는데 머리카락을 박박 민 건달 인상의 한 녀석이 말을 걸어온다. “어디서 왔니? 난 브라질에서 온 호세야.” “난 한국에서 왔어, 이름은 복잡하니깐 그냥 리(Lee)라고 불러.”(내 이름 욱정을 제대로 발음하는 외국인은 이제껏 본 적이 없다) 이렇게 말꼬를 트자 주변 친구들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기 시작한다. “난, 토미 슬라브. 크로아티아에서 장사하다가 왔다.” “난 안나야. 포르투갈에서 간호사로 일했어.” 내가 한국의 방송국에서 티브이 프로듀서로 일하다 왔다고 하자 다들 갑자기 관심을 보인다. “와~ 너도 요리 배우려고?” “나중에 나도 너의 쿠킹 프로그램에 출연시켜주라.” 요리학교 문턱에 발도 안 들여 놓은 이들이 벌써부터 피디에게 로비를 하려 든다. 슬그머니 가방에서 비디오 카메라를 꺼내 촬영을 시작한다. 어쩔 수 없는 다큐피디의 직업 본능인가 보다. 잠시 후 정문이 ‘뿌우우~’ 하는 벨소리(1980년대 퀴즈프로그램 버저 소리와 아주 비슷하다)와 함께 열리고 학생들이 ‘야호~’ 환호성을 내지르면서 학교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드디어 입성이다! 부글부글 끓는 요리사의 신세계로 풍덩 몸을 던지는 순간이었다.

 
‘르 코르동 블뢰’의 학사일정은 숨 돌릴 틈 없이 빡빡하다. 입학식 바로 다음날, 아직 현관도 못 찾아 복도를 헤매고 있는데 조리수업이 바로 시작된다. 기본적인 하루 일정은 3시간 조리시연 수업, 1시간 점심, 3시간 조리실습으로 이어진다. 쿠킹 프로그램 녹화장 같은 강의실에서 교수의 시범을 보고 난 뒤 그중 한가지 레시피를 그대로 직접 만들어보는 식이다. 수업과정이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는 매우 복잡하다. 나같이 눈과 입으로만 요리를 경험해본 이들에게는 특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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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교수 팔 6개인 듯 3가지 요리가 순식간에
 
교수의 시연수업부터 난관의 출발이었다. 3시간 동안 교수님은 스타터(전채요리), 메인, 디저트 3가지 요리의 과정을 보여준다. 교재는 오직 하나. ‘르 코르동 블뢰 바이블’로 통하는 푸른색 바인더의 레시피 북이다. ‘르 코르동 블뢰 바이블’에서 일반적인 요리책의 친절한 레시피(양파 반쪽을 3㎝ 크기로 잘게 썰어 버터 20g을 넣고 약한 불로 프라이팬에서 살짝 볶아주세요 식의)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바이블의 내용은 프랑스어와 영어 2가지로 표기된 요리 이름과 재료 목록이 전부다. 첫 페이지를 펼쳤을 때 나에겐 이것은 거의 ‘다빈치 코드’ 수준이었다.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창세기의 레시피도 이보단 상세해 보일 정도였다. 다빈치 코드는 교수님의 강의와 합쳐졌을 때 비로소 해독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다.

 
왜지? 시연수업 교수님은 3가지 요리를 빛의 속도로 동시다발적으로 요리한다.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팔이 6개 달린 인도의 칼리 여신이 내 눈앞에서 프랑스 셰프로 환생하는 것 같다. 오른손으로 푸아그라를 프라이팬에 소테(고기·채소 등을 기름·버터 등으로 볶거나 굽는 서양식 조리법) 하면서 왼손으로는 데친 양상추에 치킨 무스(거품처럼 부드럽고 가벼운 요리나 과자)를 채워 넣고 왼편 발가락으로 애플타르트 반죽을 시작한다. 그 현란한 향연을 반쯤 넋이 나간 채 보다 보면 어느새 나는 위대한 요리신의 숲에서 길을 잃게 된다. 지금 셰프가 썰고 있는 저 양파가 양상추 접시에 들어갈 건지, 메인요리에 가니시(음식의 외형을 돋보이기 위해 얹는 것)로 쓰일 건지, 지금 끓고 있는 스톡 냄비에 들어가 앉은 게 치킨 무스인지, 된장인지, 고추장인지, 완전히 몽매한 지경에서 첫 시연수업이 끝났다. 진짜 실습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내 손으로 쓰고도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레시피 노트를 들고 주방 문을 들어섰다. 오븐의 후끈한 열기가 콧등으로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속으로 되뇌었다. ‘오~ 주여, 저를 이 환란에서 구해주시옵소서.’
  
 
글·사진 KBS 피디
일러스트레이션 김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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