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쌀국수

조회수 14254 추천수 0 2012.01.03 14:23:16

세월은 정말 잘 간다. 그날이 그날인, 그저 평범한 일상이 계속되건만 무엇이 그리도 아쉬워 같이 밥이라도 한 그릇이 먹자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화를 돌려대고, 오는 해를 잘 맞이하라고 복을 듬뿍 주고받고....그러는 가운데 2012년이 되었다.

그래, 밥이라도 한 그릇.

그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기실 상당히 중요한 일일 지도 모른다. 우린 만나고 헤어지는 그 순간에 늘 밥 한 그릇이 함께 하니까.

그러나 내가 그녀와 헤어질 그 순간에는 밥이 아니라 뜨끈한 국수였다. 그것도 그냥 우리네 국수가 아니라 입안에서 부드럽게 넘어가는 베트남 쌀국수.

그녀와 내가 만난 건 2010년 8월이었다. 그녀는 결혼 이민여성이다. 그녀는 키가 작으마하고 눈이 커다랗고 피부가 까무잡잡했다. 나이는 이제 겨우 스무 살이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네, 안녕~하세요”

그녀는 서투른 억양과 살짝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그렇게 우리는 만났고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그녀의 집을 방문하여 한국어를 가르쳤다. 그녀는 한국에 온지 3달 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겨우 인사 정도나 기초 단어 몇 마디 밖에 할 줄 몰랐다. 남편은 늘 야근을 하여 오밤중에나 들어왔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할 데 없는 그녀이기에 나의 방문이 무척 반가운 일인 것 같았다.

우리는 차근차근 공부도 하고, 비록 단어 몇 마디로 통하는 대화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여름에 시작한 공부는 어느새 5개월이 지나 겨울에 끝나게 되었다. 그녀의 한국어 실력은 5개월 만에 조금 늘어

“선생님 밥 먹...?”

에서

“선생님 식사했어요? 커피 마셔요?”

정도의 말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날은 약속한 5개월의 수업이 끝나는 날이었다. 난방도 하지 않은 차가운 거실에서 덜덜 떨면서 수업을 1시간쯤 하고 나니 그녀가

“선생님 오늘 공부 끝, 이제 선생님 안 와, 선생님 보고싶어요”

하면서 나를 주방으로 끌고 가서 좁은 식탁에 앉혔다. 그녀는 미리 준비해 놓은 듯 부산하게 국물을 데우고 쌀국수를 삶고 냉장고에서 삶아놓은 수육과 야채를 꺼내더니 내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국수를 한 그릇 떡하니 갖다놓는 것이 아닌가. 뽀얀 쌀국수 위에는 잘 삶은 편육과 쑥갓, 또 이름 모를 야채가 예쁘게 고명으로 앉아있었다. 추운 마루에서 덜덜 떨고 앉아있었던 나는 아, 이게 웬 일인가 하고 체면 불구 뜨끈한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그 구수하고 시원하며 온 몸을 훈훈하게 달구던 국물 맛이라니....이제는 고명으로 얹은 편육과 야채도 먹어야지. 쑥갓도 향긋하고, 편육도 맛잇고, 근데 이건 뭐지?

“선생님 그거 한국 사람 안 좋아~요”

“뭐? 한국 사람들이 안 좋아한다고? 그래도 먹어봐야지.”

그건 바로 고수라는 야채였다. 뭐랄까? 톡 쏘면서도 매운 맛과 독특한 향이 나는, 베트남 사람들은 그 야채가 없으면 쌀국수 제 맛이 안 난다고 꼭 넣어서 먹는다는 야채. 그 낯설고 독특한 향에 찡그리는 나를 보고 까르르 웃던 그녀. 이제는 한국말도 잘하고

“선생님 새해에는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문자도 보낼 줄 안다.

오늘처럼 추운 겨울날이면 그녀의 감사하는 마음이 녹아 더 뜨끈하고 부드러운 쌀국수, 그녀의 그 쌀국수가 간절히 생각난다.


  • 싸이월드 공감
  • 추천
  • 인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수
공지 [이벤트] 사랑은 맛을 타고! imagefile 박미향 2011-11-18 82707
공지 [이벤트] 여러분의 밥 스토리를 기다립니다 - 밥알! 톡톡! - imagefile 박미향 2011-05-20 90798
61 '사랑은 맛을 타고' 사연올립니다. file 497angel 2012-01-19 14786
60 하늘같이 파란 맛, 초록처럼 푸른 맛 zmsqkdnl 2012-01-18 12987
59 [사랑은 맛을 타고]꽁치의 화려한 변신 congimo 2012-01-17 12845
58 <사랑은 맛을 타고 응모 합니다> 가장 맛있었던 밥상? (남이 차려 준 밥) kchjkh 2012-01-17 12886
57 사랑은 맛을 타고-강아지도 외면한 첫 요리의 추억 xhddlf8794 2012-01-17 12885
56 사랑은 맛을 타고 응모합니다~ file pemart 2012-01-16 12889
55 울남편은 방귀대장 뿡뿡이? ejdyb 2012-01-16 12950
54 다슬기 수제비의 추억 mkh903 2012-01-15 13030
53 사랑은 맛을 타고 응모합니다<아동센터아이들의샌드위치> jennylee308 2012-01-14 12903
52 "돌돌돌" 돼지바베큐 ipuppy 2012-01-14 12994
51 어머니와 꽈리고추찜무침 ms6445 2012-01-14 14672
50 정성만 가득했던 음식 mikky005 2012-01-13 13061
49 참치 청국장의 반전 image jjs6862 2012-01-13 12992
48 사랑은 맛을 타고. 응모합니다!<레디 액션! 그 최고의 원동력> moon9410 2012-01-12 12965
47 <사랑은 맛을 타고> 응모 (나마스떼, 네팔씨!) pedori 2012-01-11 12818
46 사랑은 맛을 타고~ 응모해요^.^* file warmapril 2012-01-10 12780
45 슬픈 빨간고기 cck8397 2012-01-09 12839
44 사랑은 맛을 타고 응모글 file lim2525 2012-01-07 12732
» 그녀의 쌀국수 ssogon2 2012-01-03 14254
42 일곱살의 대오각성 file lmijin0477 2011-12-19 13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