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이 된 해. 또래 아이들이 실감나게 다가오는 대학 입시의 압박에 너도나도 학원에 등록하기 시작한 3월의 첫날, 당장 입을 옷 몇 벌과 입학 과제를 캐리어에 담은 채 떨리는 가슴을 안고 서울행 KTX에 올랐다. 부산 토박이가 수도권으로 진출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기숙사제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모두들 부러움을 보냈다. 제 갈길 찾아서 잘 갔다고 하는 속모를 소리 속에 홀로 다른 세계에 떨어진 것 마냥 외로웠다. 거기다 한 나라 안에서 뭐가 그리 다 다른지 말투도 다르고 입맛도 다 달라 서러운 한 달을 났다. 모두 새 학기라고 들떠 봄 바람난 아가씨마냥 순식간에 지나간다 했는데, 나에게 그토록 긴 한 달은 처음이었다. 한 달 내내 삼시세끼 먹어야 하는 급식에 부산의 그 짭쪼름 한 맛은 기억 속에서 되새김질 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향수병이 뭐 길래 밤에 별똥별처럼 저 멀리 고속도로를 지나가는 자동차만 봐도 눈물을 찔끔찔끔 흘렸다. 견디지 못해 전화를 걸어보면 휴대폰 너머 듣는 그 익숙한 사투리도 타향살이의 고통만 절절히 느낄 뿐이었다.
그렇게 힘겨운 반년을 보내고 남쪽보다 일찍 물든 낙엽을 따라 10월이 되었을 때, 수업의 일환인 단편 영화 촬영에 허덕일 그 때, 내 생일도 돌아왔다. 한 달에 한 번, 급식에서 생일상이랍시고 미역국이 나오긴 하지만 입에 맞지도 않고 비리기만 한 그 미역국조차 날짜에서 어긋나 생일이 오히려 오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데 생일 날 당일. 문자를 받고 내려간 경비실 앞에 떡하니 내 이름이 적혀있는 커다란 택배 상자가 놓여 있었다. 들뜬 마음에 무거운 줄도 모르고 기숙사로 들고 올라와 뜯은 그 속엔 새 옷과 미역국과 팥밥, 등뼈 찜이 얼려진 채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열자마자 나는 집 냄새. 눅눅한 빨래내 사이로 뭉근하게 퍼지는 그리운 냄새였다. 미역국. 먼저 번 아이들이 귀신같이 골라간 고기에 미역 섞인 맹물만 먹었던 서러움이 꽁꽁 얼은 미역 사이 군데군데 보이는 갈색 소고기에 스르르 녹아내렸다.
그리고 그날 밤. 다른 방에서 한창 놀고 있을 때 반 아이가 날 황급히 불러대었다. 이유 없이 빨리 오란 그 아이 손에 이끌려 들어간 809호 내 방. 룸메이트들이 한창 늦은 저녁의 정취를 만끽해야 할 그 방의 불이 꺼져 있었다.
‘뭐야.’란 말을 내뱉자마자 환해지는 방안. 그리고 엎어진 택배 상자 위엔 전자레인지에 녹인 미역국과 팥밥이 엉성한 스티로폼 그릇에 담긴 채 놓여있었다. 그리고 옷장 뒤와 침대 구석구석에서 같은 반 아이들이 개구 진 얼굴을 내밀었다. 뒤늦은 폭죽소리가 터지며 긴장해 하얗게 변한 그 손에는 저들 먹으려 꼭꼭 숨겨놓은 과자들이 들려 있었다. 룸메이트들이 돈을 추렴해서 산 꿈도 꾸지 못한 비싼 커피 믹스가 선물 준비 못해 미안하다는 얼굴로 내민 예쁜 편지들이, ‘다음에 주마.’ 라며 민망한 표정으로 건네는 그 말이 그간 집 그리웠던 아픔도 모두 녹여주었다.
그리고 한 아이가 억지로 떠먹인 플라스틱 수저에 담긴 미역국. 덜 녹은 밥알이 어그적, 어그적 씹히는 그 국에 만 밥이 어찌나 맛있던지 글썽이는 눈물을 감추려 고개를 푹 숙이고 씹었다. 덜 녹아 바스스 흩어지는 팥알과 미끈한 미역이, 그리고 코 안 가득 매운 고소한 참기름 내가, 찝찌름한 그 맛이 어찌나 생생하고 그리웠던지 한숨에 마시 듯 다 비워버렸다. 그리고 두 번째 그릇. 같이 고생한 친구들에게 양보했다. 집 밥이 고팠던 것일까. 연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퍼먹는 아이들은 엄마의 손맛을 칭찬했다. 그 뒤 빠르게 다가온 추운 겨울보다 힘들었던 영화 촬영.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그 힘의 원동력은 그 때의 그 미지근한 미역국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