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생활 9년차, 자취방에서 해먹는 음식이라고는 라면이 전부였던 시절의 일이다.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먹을 기회가 생길 때마다 양껏 먹어둔다는 자취생의 생존철학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부서 엠티가 있던 날, 오늘은 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나 있었다. 엠티 장소에 도착해 족구로 몸을 푼 뒤 드디어 고기파티가 시작되었다. 숯불 위에서 맛나게 익어가는 고기를 안주로 흥겨운 음주를 이어가는 동안, 요리 잘하기로 소문난 선배 J는 고기를 굽고 불판을 가는 사이사이 찌개를 끓이는 등 솜씨를 뽐내고 있었다. 동료들은 그런 J의 모습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J는 사람들의 칭찬에 제법 우쭐한 모습이었다. 나 역시 J를 추켜올리며 모처럼의 이 포식 기회를 맘껏 즐기고 있었다.

 

그때 한 후배가 내게 “선배도 요리 좀 한다고 했잖아요. 내일 아침은 선배가 끓여주는 찌개 어때요?” 하는 것이 아닌가. 엠티 오기 전 함께 장을 볼 때 이런저런 참견을 하며 큰 소리 친 것을 후배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을 후회하기에는 때가 이미 늦어있었다. 후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러고 보니 너는 하는 일 없이 먹기만 하더라 하는 원성에서부터 은근히 음식 가리는 거 같던데 어디 요리는 얼마나 잘 하나 보자라는 협박성 멘트까지 그야말로 아우성이었다. 자연히 다음날 아침 식사 당번은 내가 되어버렸고, 찌개 한번 제대로 끓여본 적이 없는 나는 실로 난감한 이 상황을 어떻게 넘겨야하나 하는 생각에 눈앞에서 익어가는 고기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술기운이 돌면서 든 생각은, 찌개가 뭐 별거 있나 고기 많이 넣고 끓이면 맛이 나겠지 하는 거였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다들 술도 덜 깨어 있을 텐데 맛이나 제대로 알고 먹겠어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나름 정리하고 다시 술과 고기의 향연을 맘껏 즐겼다.

 

다음날 아침 술이 덜 깬 상태로 냉장고에 남아있는 재료들을 늘어놓고 잡탕찌개를 끓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고기도 많이 넣고 야채도 많이 넣었는데, 맛은 갈수록 한심해졌다. 급기야 전날 밤 남은 고기를 다 썰어 넣었지만 내가 봐도 맛이 영 이상했다. 조미료를 더 넣어야하나 국물을 좀 더 조려서 맛을 내야하나 머릿속이 복잡할 즈음 동료들이 하나둘씩 밥상에 둘러앉기 시작했고 드디어 아침식사가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숟가락을 들고 찌개 맛을 본 선배 J가 훕, 하면서 숟가락을 내려놓았고 혹시나 하는 얼굴로 국물 맛을 본 나머지 사람들도 뭐야 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취생의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결국 찌개는 엠티 숙소의 강아지 차지가 되었다. 고기가 이렇게 많이 들어갔는데 이걸 개에게 주어야한다니 속이 쓰렸지만, 나도 먹기 힘든 맛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개 밥그릇에 찌개를 부어주고 돌아서려는 순간 툭, 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세상에, 이놈의 개새끼가 밥그릇을 엎고 아무 미련도 없이 개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아, 나의 첫 요리는 개조차 외면할 정도의 맛이었단 말인가.

 

아내가 감탄할 정도의 김치찌개는 끓일 정도가 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배시시 웃음이 난다. 전국의 자취생들이여, 잘들 챙겨먹고 힘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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