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 속 같은 지하방으로 어느 날 그녀가 내려왔다. 동아리 후배의 주선으로 몇 번 만났던 전문대생이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부모님과 말다툼을 벌인 후 집을 나와 딱히 갈 곳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대낮에 불을 켜도 음음했던 지하방은 길 잃은 여자 열 명은 누울 수 있을 만큼 휑하니 컸다.
햇빛이 싫은 건지 세상이 싫은 건지 그녀는 내가 학교에 가거나 아르바이트를 간 사이, 어디로도 나가지 않고 껌딱지처럼 방바닥에 붙어만 있는 눈치였다. 가진 거라곤 가난과 헐렁한 시간과 불안한 미래뿐이었던 젊음. 허기진 청년의 식사는 배를 채우기 위해 먹었던 라면과 김밥 따위의 분식이 고작이었다.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하던 학교 구내 식당에서 가져와 한쪽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사각 양은 쟁반에 그녀가 촤르륵 쿠킹호일을 뜯어 차륵차륵 씌웠다. 휴대용 버너에 불을 붙이고 그것을 올려놓고는 식용유를 휘휘 둘렀다. 그리고는 동글동글 썰어 둔 호박에 풀어둔 계란을 입혀 애호박전을 부쳤다. 지글 지글 끓는 기름 소리와 고소한 냄새가 눅눅한 습기로 젖은 공간에 가득히 퍼졌다.
“와아, 맛있다. 이렇게도 부쳐지네”
뜨거운 것을 호호 불어가며 먹는 것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맛이었다.
또래보다 늦은 나이에 좀 더 배워보겠다고 집을 떠난 후로는 팔기 위해 만든 음식이 아닌 것을 먹어본 적은 거의 없었다. 따뜻한 애호박전이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새로웠던 것은 긁히고 찌그러져 아무도 안 주워갈 같은 쟁반이 프라이팬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후로도 그녀는 지상으로 올라갈 생각이 없는지 동네 슈퍼에서 산 값싼 식빵으로 프렌치 토스트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쟁반 프라이팬에 길들여졌던 것일까. 몇 년 뒤 그녀는 나의 아내가 되었다. 덩치 큰 살림 몇 가지가 늘어났지만 더 이상 새로울 것은 없는 신혼이었다.
그 후 꼭 이십 년이 흐른 지금, 그 쟁반은 언제 어디로 사라져 무엇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옛이야기를 할 때면 부엌조차 없었던 ‘쟁반 프라이팬의 시절’이 진짜 신혼이었다며 우리 부부는 미소를 나누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