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방학이 가까워오면 커다란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려 가며 외할머니댁에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었다. 그건 우리 외할아버지께서도 똑같은 마음이셨던가 보다. 방학이 시작되면 우리집 전화도 바빠지긴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
"다른 집들은 벌써부터 손주들 웃음소리로 떠들썩한데 어째 우리 손주들은 소식이 없냐. 허허......."
외할아버지의 은근한 재촉에도 엄마는 쉬이 친정나들이에 나서지 못하셨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막내는 아직 아기인데다가 어린 녀석들을 넷이나 데리고 서울에서 안양을 거쳐 안산까지 가야 하는 친정길이 엄마에겐 참으로 벅찬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유난히 멀미가 심한 내가 제일 큰 걱정거리였다고 하셨다. 그 때문에 나는 차에 타자마자 자겠다는 다짐을 하고서야 외할머니댁에 따라갈 수 있었다. 쉴새없이 덜컹대는 시골길을 멀미를 참아가며 가야하는 건 고역이었지만 외할머니댁에 도착하는 순간 모든 건 행복으로 바뀌었다. 차장 언니의 "탕! 탕!" 두 번인가 차를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버스가 떠나고 나면 나를 반겨 주던 흙냄새, 풀냄새 그리고 코를 찡긋하게 만들었던 시골 냄새.......
어느 핸가 여름이었다. 언제나처럼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반겨주셨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서는 우리가 도착하자 마자 "우리 손주들 만난 거 뭘 해줄까나?" 하시며 부지런히 밭으로 나가셨다. 밭에서 돌아오실 때에는 커다란 광주리에 가지며 오이며 고추, 깻잎 등 싱싱한 채소들로 가득했다. 또다른 광주리엔 참외, 자두, 복숭아가 한가득이었다. 특히 복숭아가 담긴 광주리에선 단내가 가득했다.
"흐음~, 맛있겠다!!"
저절로 침이 꼴깍 넘어가는 복숭아 냄새에 우리는 신이 나서 복숭아 광주리 주위에 둘러앉았다.
"자, 지금부터 불 끄고 먹는 거다. 누가 맛나게 먹나 보자. 시작!"
마루에는 전구가 하나 있었는데, 외할아버지께서는 노오란 불빛이 나는 전구의 검은 똑딱이를 돌려 끄셨다.
복숭아는 너무나 달고 맛있었다. 난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게 있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 때 외할아버지께서 왜 전구의 불을 끄셨는지는 나중에 커서야 알게 되었다. 복숭아는 워낙에 단 과일이라 벌레가 먹기 쉬운데 지금처럼 농약을 많이 칠 때도 아니니 더 많지 않았을까 싶다. 외할아버지는 어쩌다 어린 손녀딸이 벌레라도 한 마리 볼라치면 맛난 복숭아는 다 먹인 것일 테니 그러셨을 것이라는 것을........
첫아이를 가졌을 때였다. 입덧이 심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할 때였는데 유독 복숭아만 먹고 싶었다. 게다가 겨울이어서 복숭아를 구하기 힘든 때였다. 외할아버지의 복숭아가 너무나 생각났었다. 지금도 난 과일 중에서 복숭아를 제일 좋아한다. 복숭아를 먹을 때면 늘 어린 시절 그 때가 떠올라 행복해진다. 내게 잊을 수 없는 특별한 맛을 선물해 주셨던 외할아버지, 뒤뜰에서 허허 웃으시며 어린 우리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외할아버지가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