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했던 나의 대학1학년 시절,복학생이던 그는 소위 말하는 운동권 이었다.
나이많은 ' 형'이었던 그는 한참어린 동급생인 나에게 가방을 맡겨두고,매일 광장으로 거리로 나다녔다.
아침일찍 학교 도서관에 가보면 어제 늦게까지 맡아두고 기다리다가 그냥 놓고 갔던 그의 가방이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그는 또 다른 가방을 둘러메고 아침인사를 하며 나타나곤 했다.
아마 학교에 올때는 가방을 메고 와야 한다고 생각 했나보다.
그런 날은 두 개의 가방을 맡아 주어야 했다.
지금생각하면 그때 왜 그랬는지 후회막심 하지만,(대학생인 딸에게 복학생과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 이른다.그는 지금 내 남편이다.)
그땐 독립투사 군자금 가방이나 되는듯 도서관 내 옆 자리엔 사람대신 그의 가방들이 놓여 있었다.
그렇게 한 학기가 흘러가고 가을쯤 그는 내게 한 친구를 소개하며 '사회과학'공부를 제안 했다.
학내 집회에서 자주보던 친구였다.
여학생중심의 사회과학학습 동아리를 새로꾸리는듯 했다.그러마고 건성으로 대답했고, 얼마후 학과 사무실에 내 이름으로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다.발신인은 휘갈겨쓴 '흑 장 미'.이 뭐꼬?
내용인즉,이 암흑의 시절에 민주를 열망하는 여학우들이 함께 모이자는 뭐 대충 그런 내용 이었다.
그 편지이후 흑장미는 한동안 연락이 뜸 했다.그러다가 어떤책을 읽고 모처로 모이라는 흑장미의 두번째 편지가 왔다.그 때는 기말시험도 마치고 방학이 시작되는 시점 이었다.방학에 뭔 모임이람,투덜대며 간 곳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빠져 나가 휑한 자취촌 이었다.
추운날씨,처음 만나는 사람들,어떤 낯선 두려움등으로 불기없는 자취방은 더 추웠다.
그때 내마음을 아는듯 그방 주인이 말했다."추운데 밥 먹고 할까?"
가난한 자취생인 그녀들은 미리 준비 해 놓은 밥상을 들여왔다.
갓지은밥,계란입힌 두부부침,간장.반찬은 그게 다 였다.
춥고 배고팠던 우리는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그때이후 지금까지도 그렇게 부드럽고 고소한 반찬과 밥을 다시 먹어보지 못하였다.
그때읽은 책제목이 뭔지 ,어떤 토론을 했는지 그후의 모임이 어떻게 진행 되었는지는 희미하다.
그렇지만 그밥맛은 기억한다. 그 첫모임 이후 나는 변하였고,생각이 달라졌다.
'주장'이나 '학습'이 아닌 따뜻한 밥상이 어설픈 나에게 더 쉽게 통했다.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따뜻한 진보를 꿈꾸며,오늘도 밥상을 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