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이 우러나고 남은 멸치가 퉁퉁 불어서 그릇 바닥에서 잠수를 타고 있고, 희번덕거리는 멸치 비늘이 유영을 하는 그 떡국은, 유별나게 입이 짧았던 젊은 시절의 나를 만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음식이었다.
차마 수저를 내려놓을 수가 없어서 떠먹는 시늉을 했지만 떡국은 아무리 해도 줄어들지 않았고 그 모습을 지켜보시던 아버지께서는 겸연쩍은 듯이 한 말씀하셨다.
“내가 생전 떡국을 끓여 봤어야지. 국물에 뭐든 넣어야 할 것 같은데 마침 멸치가 있기에 넣어 봤다.”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친척 할머니께서 집에 머무르시면서 이런저런 부엌일을 맡아주셨는데, 어쩐 일인지 그 날은 할머니도 시골로 내려가신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 다닌다고 외지에 나가 있다가 연휴를 맞아 집으로 내려온다는 딸내미를 위해 밥상을 차려주어야겠다고 맘먹은 아버지께는 아마 떡국이 가장 만만했던가 보다. 구정 때 먹고 남은 떡은 채 불지 않아 딱딱했고, 제 때에 멸치를 건져내지 않아 비릿한 냄새가 떡 맛을 삼켜버린, 내 인생의 잊지 못할 그 음식은 아버지께서 만드신 첫 음식이 아닐까 싶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늘 엄하시고, 때론 무섭기까지 하여 우리 다섯 남매에게 있어 아버지는 어려운 분이셨다. 자질구레한 용돈이나 학교 이야기도 어머니께 이야기하기 마련이었고, 어머니와 다툰 후 단식이라는 카드로 어머니 속을 태울 때나, 입에 맞는 반찬 없다고 밥상머리에서 투정을 부리다가도, “은주야!” 부르시는 아버지의 한 말씀에 나는 순한 양으로 급변하여 밥 때를 위해 하루를 기다린 사람처럼 수저를 들기 일쑤였다.
그렇게 무섭기만 하시던 아버지는 혼자되신 후, 오랜 세월 쓰고 계시던 가면을 벗어 던진 사람처럼 조금씩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이른 출근과 늦은 퇴근만이 생활의 전부였던 아버지께서, 새로 장만한 소니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 가요에 시간을 내주시기도 하고, 그림과 서화에 취미를 들이시고 온 집 안을 먹향으로 채우시기도 했다. 외로우셨을 게다. 오직, 가부장적인 권위와 위엄만으로 버텨 오신 가정생활, 속내를 드러내는 일을 가벼운 언행이라 여기셨을 생각에 수십 년 갇혀 계시던 아버지……. 여태껏 지탱해 오던 아버지와 남편의 모습 속에 눌려 있었을 속 깊은 외로움, 나눌 이 없어 더욱 절절했을 그 황량함과 쓸쓸함…….
그런 아버지는, 비릿한 떡국 한 그릇으로 어느 날 나에게 다가오셨다. 제대로 퍼지지 않은 떡 같은 어색함으로, 무엇을 넣어야 할지 몰라 맹숭한 국물 같은 담담함으로. 하지만 넘치는 부성을 담아내기라도 한 듯이 쌀쌀한 초봄을 녹였던 뜨거운 국물……
그 떡국을 한 번만이라도 다시 먹을 수 있다면 싱그러운 초여름의 녹음이 이리 서글프지 않을지 모른다. 그 비릿함을 한 번만이라도 다시 맡을 수만 있다면 피었다 지는 꽃들이 이토록 애달프지 않을지 모른다.
(정은주,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