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맛

조회수 8020 추천수 0 2012.05.23 00:59:14

 지난 여름 고2 여름방학동안 케냐에 아는 분을 통해 3주 예정으로 여행을 갔다. 내가 간 곳은 고도가 높아 덥지도 않고 벌레도 없어서 생각보다 쾌적했다. 무성한 초록과 선명한 하늘에 사로잡혀 원 계획보다 한달정도 더 눌러앉아 있어 보기로 했다. 현지 고등학교도 한번 다녀보기로 했다. 기숙사 학교였다.

케냐에서는 스와힐리어와 함께 영어도 공용어로 쓰기이 떄문에 의사소통의 문제는 없었는데, 음식 문제가 의외로 크게 다가왔다. 어딜 가나 학교 밥이 집밥보다 나을 수야 없겠지만은, 200인분의 음식을 솥 하나에 넣고 생산해 내는데 가끔 설익은 음식까지 내놓는 탓에 '이건 못먹는 음식' 이라며 받자마자 단호하게 개에게 줘 버리고 매점으로 달려가는 친구들도 있을 정도였다.

요리사는 겨우 넷 뿐이라 재료 손질할 시간도 부족한지 일주일 만에 급식에서 지푸라기와 엄지손톱만한 돌과 조우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점점 급식실에 가고 싶지가 않았다. 학교 들어간 지 이주 째 되었을 때는 거의 매점에서 우유와 찻잎과 우유와 설탕 넣고 끓인 차이만 마시며 지내느라 하루 종일 배가 고팠다. 친구들은 매점에서 감자칩이나 초콜릿 과자도 사먹는데 원래 그런 걸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뭐가 들었을지 찝찝해서 매점에서 사먹을 수 있는건 복잡한 가공 과정이 없는 우유 뿐이었다.

케냐 가면 열대과일은 실컷 먹겠구나 하고 기대를 잔뜩 하고 갔는데 시내에서 차로 10분 떨어진 산 위의 학교에서 과일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일단 우유만 먹으며 버티며 예정에 없던 기아 체험을 하던 중 내가 뭘 위해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 떠나면 그냥 고생' 이라던 엄마 말을 실감하며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 시기였다. 시내에 사는 학교 직원 중 한명이 '오다가다 하면서 과일 좀 사다줄까?' 하고 햇살같은 제안을 한 것이다. 과일값을 준 다음 날 파파야와 아보카도를 받았다.

팔뚝만큼 길쭉한 파파야는 무르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익어서 칼 없이 숟가락으로 힘주어 반으로 가를 수 있었다. 초록색 껍질 속의 단단한 선홍색의 과육이 나왔다. 즙이 뚜두둑 흐르며 달콤한 향이 확 퍼졌다. 쓴맛이 나는 씨를 긁어서 버리고 살을 떠먹으니 달큼한 맛이 쭉 머리에 퍼졌다. 신맛은 하나도 없고 달콤한 맛만 있었다. 세상에 파파야는 너무 맛있었다. 이런 맛을 품어 내다니 파파야 나무를 만나 감사 인사라도 한번 드려야 할 것 같았다.

한편 아보카도는 많이 익어 물렁했다. 반으로 갈라 무겁고 큰 씨를 버리니 둔탁한 소리가 났다. 움푹하게 씨의 여운이 남은 진한 연둣빛의 살을 떠 입에 넣으니 진하고 고소한 맛이 났다. 무거운 씨를 가진 과일의 살은 가볍게 입에서 녹았다. 중독성이 있는 부드러움이었다.

맛있는 걸 다 먹고나니 뱃속과 마음에 강물같은 평화가 찾아왔다. 케냐가 엄청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엄청난 맛을 내는 과일을 품어내는 땅엔 뭔가 엄청난게 있을거라고 생각되었다. 3주만 있을 게 아니라 적어도 반년은 있어봐야 엄청난 걸 제대로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그순간 끈적해진 손으로 앉아 스케줄을 연장하기로 단번에 결정해버린 것이었다. 조금 지나자 나중에는 여러 학교 친구들이 외출할 때 사다 주기도 하고, 학교 음식에도 어느 정도 적응해서 먹는 게 편해져 다행이었다. 그렇게 나는 케냐에서 아주 특별한 8개월을 보내고 돌아왔다. 문제는 요즘도 파파야가 먹고 싶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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