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이였다.. 지금으로 부터 이십년도 더 지난 시절을 불러오려한다.
지방에서 여자대학을 졸업하고 이년여간 나름의 사회봉사활동을 한답시고 조그만 사설도서관에서 어린 친구들과 삶에 지친 어른들에게 책을 권하고 모임을 꾸리던시절..
어떻게 살아야하나라는 나름 삶에대한 진지한 고민과 방향을 모색해야한다는 절실한 과제를 안고 무작정 배낭을 꾸리고 강원도로 향했다.
가진돈도 별로 없이 사계절입던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찾았던 산은 오대산!
점심도 거른채 초콜렛 두개를 가방에 넣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여름이 시작되는 신록이 무르익던 계절 유월이였다.
꼭 정상을 올라야한다는 젊은 패기하나만으로 그저 꼭대기를 향해 올랐다.
드디어 정상! 그곳에서 탁트인 하늘을 보며 노래를 열댓곡 부르고 나름 정상에 오른마음으로는 앞으로 못할게 없다는 굳은 결의를 다지고 내려오는데..어둠은 내리고.. 아침밥으로 조금 채운 배가..아.. 정말 배가 미치도록 고팠다.
내려오는 길은 더욱 어두워지고 다리는 꼬이고..초콜렛은 이미 산을 오르면서 다 먹어버리고 몸에 여유지방이 붙어있던 시절도 아니였다.
중턱즈음 산장이 보였다. 애초에 거기서 자고가려고 마음먹었기에 산장엘 들어갔다.
그때의 산장이란 그저 공간의 의미였다. 들어서면 마당가운데 수돗가가 있고 본채같은 큰공간이 일층에 있고 그반대편 마당의 철재계단을 타고 이층으로 올라가면 두개의 방이 계단을 가운데 놓고 양쪽으로 있었다. 창틀과 방문틀은 있었으나 문짝들은 없어 바람은 사통팔달로 통하는 그저 세개의 공간이였다.
먼저온 할머니 두분이 일층 독채를 차지하고 계셨고 난 얼른 반대편 이층에 한방을 골랐다.
여럿이 쓰는곳이지만 사람이 없으니 독방이나 다름없었다.
자리는 잡았으나 배는 여전히 고팠고 저녁 무렵부터의 긴시간은 외로움이였고 초여름의 산속날씨는 쌀쌀했다.
잠시후에 옆방으로 성큼성큼 들어서는 한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가상케도 남자였다.
보기에도 산속이 환해지는듯한 훈남이였다. 그는 나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잘차려입었으며 커다란 배낭에는 벌써부터 범상치않은 준비물이 들어있을것 같았다. 뚝딱뚝딱 부시럭부시럭 분주히 움직이면서 무언가를 준비하는데 씻으려고 일층으로 내려가면서 곁눈으로 얼핏보니 버너에 코펠에 침낭까지 펴져있었다.
난 정말 미친듯이 배가 고팠지만 허리를 꼿꼿이 펴고 일층 수도가로 내려가는데 아~ 이건 무슨 냄새인가! 학교를 마치고, 동네친구들과 저녁무렵까지 놀다지쳐, 모든 일상의 짐이며 즐거움과 괴로움을 뒤로하고 저녁이면 본능에 따라 돌아가는 그곳, 집에 들어서면 나던 그냄새.. 쌀밥냄새였다. 엄마냄새가 묻어있는 쌀밥냄새였다. 포근하고 가득차고 편한 냄새...
할머니 두분이 솥째 마루에 올려두고 밥을 드시고 계셨다. 아 정말 모든걸 포기하고 두분께 달려가 얻어먹고 싶었지만 차마 말을 못하고 붙잡아주길 바라면서 천천히 수도가에서 푸드득거리고 씻고난 후 발걸음을 돌리려는데.."처녀! 밥안먹었으면 밥먹지" 잠깐도 망설일수가 없었다. "아~ 그래도 되겠어요?" 하면서 이미 발걸음은 마루로 향했다.
정말 쌀밥이였다. 할머니 두분이 드시고도 솥에 밥은 가득남아 있었다. 반찬은 달랑 새우젖 하나 였다. 눈물나게 간절해서 더없이 맛있는밥을 나는 그때 처음 먹어본거같다. 밥솥에 있던 밥을 다 먹어버렷다. 할머니들이 아마도 내일아침에 드실 밥이였으리라. 그리고 점심까지 챙겨드실요량으로 넉넉히 지은 밥일터인데 다 먹어 치워 버렷다. 새우젖이 그렇게 달콤할수가 없었다. 갖지은 밥의 고소함과 새우젖의 짭조름하게 감칠맛나는 달콤함을 배고픔이 아니면 알지못했을 그맛을 보았던것이다. 할머니들의 놀라워하는 눈빛을 애써 무시하고 솥을 들고 성큼성큼 수돗가로가서 깨끗이 설겆이를 마치고 경건하게 깊이 허리숙여 진심으로 고맙다 말씀드리고 철재계단을 올라서는데..
옆방에 든 훈남의 한마디 "밥 이인분했는데 나오세요~ 같이 드시죠"
요즘 말로 "헉!!" 그러나 거절할수가 없었다. 그는 훈남이였고, 밥은 이인분이라하고, 가진자의 여유가 주는 따사로운 호의, "그래도되요? 그럼 조금만 먹을까요..." 마주앉은 자리에는 코펠에 갖 지은 밥과 참치김치찌개가 있었다. 남들은 연애를 할때 하루사이에 천당과 지옥을 넘나든다한다. 난 밥으로 하루사이에 천당과 지옥을 넘나든거같다.. 미치도록 고팠던 배는 목구멍까지 차올라 있었다. 말도 하기싫을만큼 불렀다.
설겆이도 시키지 않는 훈남은 커피를 타와서 말을 걸어왔으며 많은 얘기들로 저녁의 어스름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젊음의 공통점을 안고 제법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는 군에 입대를 앞둔 대학생이였고 입대전에 여러가지 생각할것이 있어서 산에 올랐다한다.
해는 일찍 지고 산장에 깊은 밤이 오고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침낭에 들어가서 잤고 난 내방에 돌아와 새우등을 꼬부린채 밤새도록 뒤척였다. 훈남의 모습이 그리워서도 아니였고, 큰뜻을 품고 미래를 고민한것도 아니였고, 그저 저녁내내 먹은배를 소화시키느라 바쁜 위장과 위장의 운동에 동요하지 않고 옆방에서 곤히 자는 훈남에게 표내지 않으려는 내 이성의 날카로운 대립으로 뒤척였으며 차가운 유월의 산장은 덮을것 하나없이 반팔에 청바지를 입고 누운 나에겐 시베리아 벌판같았으므로.
다음날 훈남은 오르던 산을 계속 올랐고 난 내려오던 산을 계속 내려왔다.
여러가지로 내인생에 큰 지렛대가 되어준 여행이였다.
단촐한 한끼 밥상의 따사로움과 고마움을 알게 해주었으며 그간 살아오던 길의 방향을 완전히 다르게 바꿔 살게 되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