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어머니께 간장게장을 선보이다
어머니의 손맛을 맛의 전형으로 여겨 온 나는 이제껏 맛으로 빛난 적이 한 번도 없다. 아니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로 눈밖에 나 있다고나 해야 할까.
아이들에게도 싱글맘, 워킹맘을 방패막이삼아 ‘음식손방’을 당연하게 자랑(?)하며 전혀 나만의 맛의 개혁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문득 해주고 싶은 음식이 떠올라도 ‘아이들이 입이 짧은 걸...’, ‘도저히 시간이 안 나는 걸...’ 하며 차일피일 미루며 산다.
무엇보다 어릴 적 엄마가 해주셨던 냉이· 비름나물 · 민들레나물무침, 무짱아찌, 고구마순볶음, 간장게장, 콩국수 등은 지금도 내 입가를 맴돌며 생각만 하면 군침이 나게 한다.
오히려 한가할 때보다 바쁠 때 틈새 시간의 무게를 더욱 귀하게 여길 즈음 이젠 늙으신 친정어머니께 나도 음식으로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이 언뜻 맘속에 꽂혔다.
제아무리 없는 시간도 맘만 먹으면 낼 수 있는 법, 받아먹기만 했던 내게도, 아무리 음식손방이나 어머니께 드리고 싶다는 맘과 나도 맛있게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한 번도 사보지 않은 살아있는 꽃게를 사게 했고, 간장게장을 난생처음으로 만들게 했다.
그간의 내 음식솜씨로 볼 때 감히 기대는 할 수 없었지만 맛있게 되기를 바라며 간장국물을 두 번 더 끓여 붓고 며칠 지난 날 퇴근해 오니, 맛에 민감한 딸아이가 “엄마, 나 게 한 마리로 밥 다 먹었어!” 한다. 딸아이는 입이 짧고 제 입맛에 맞는 거만 먹는 편이지만 맛에 관해선 꽤 알아주는 심사위원이다.
1차 딸아이의 심사에 자신을 얻은 나는 정말 맛이 괜찮은지 배고플 때 조마조마하며 게장을 꺼내 밥이랑 먹어봤다. 말린 홍고추를 구색으로 넣은 것이 더욱 감칠맛이 났다. 자화자찬인지 모르나 유명 한식집 게장도 이보다 더 맛나지는 않을게다. 밥 두 그릇을 뚝딱 비운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바로 어머니께 선을 보였다. 긴 시간을 못내 가까이 사는 언니한테 엄마 갖다 드리라고 한 지 열흘 남짓 됐을까... 떨리는 손으로 어머니께 전화를 했다. 어두우신 귀로도 나를 알아보시고는 대뜸 “네가 한 게장 잘 먹었다. 네가 그런 걸 어째 할 줄 아니?” 하신다. 순간 가슴에 짜릿한 전율과 함께 기쁨의 미소가 나를 감쌌다. 맛이 없으면 그냥 웃기만 하시고 정말 맛이 나면 맛있다고 말씀하시는 어머니는 딸아이보다 훨씬 깐깐한 분이셨기에, 간장게장은 어머니만의 특별요리인 줄 알고 내내 받아먹기만 했던 나도 할 일을 쬠 했다는 기쁨을 간장게장이 안겨주었다. 아마도 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맛이 너무 그리웠고, 입맛을 잃지 않으신 아흔을 앞두신 어머니께 정말 늦으나마 직접 내가 만든 음식을 드리고 싶은 간절함이 통한 게 아닐까.
아! '선무당이 사람잡겠다'는 트라우마가 지배해 용기조차 내지 못한 나에게, 엄마나 언니들이 해주는 것만 먹던 나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첫 테이프를 간장게장이 끊게 해 주다니... 한 번의 자신감은 참으로 귀한 거다. 음식손방이란 딱지를 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닌가.
날씨가 몹시 덥다. 더운 날 생각나는 메밀 국수 국물을 끓여 본다. 차게 식혀 병에 넣어 갖다 드리면 몇 번은 맛있게 드실 수 있도록 말린 참치(가쓰오부시)도 한줌 수북이 넣어 끓여 본다. 짧은 휴가지만 이번엔 건홍고추를 갈아 만든 열무김치와 메밀국수 국물을 아이스박스에 넣어 엄마를 찾아뵈어야겠다. 왠지 마음이 한결 가볍고 발걸음도 날아갈 것 같다. 어머니, 오래오래 사세요. 막내딸이 맛있는 거 많이많이 해드릴게요.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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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이 영 숙 ( 010-7457-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