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허가 받지 않은 투망은 불법으로 간주되지만 4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여름날, 퇴근하신 큰아버님이 투망을 어깨에 두르고 무심천에 서면 긴 여름 해가 서산에 걸릴 무렵이었다. 청주 시내를 흐르는 무심천은 홍수 때가 아니면 깊어도 무릎을 넘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혹은 친구들과 천변에서 놀다가라도 이삼 일 건너 한 번씩 나오시는 큰아버님을 기다렸다. 큰아버님께서도 의례히 내가 있으려니 하시거나 간혹 내가 없는 날이라도 혼자서 투망과 어망을 들고 나오셨다.
서녘의 햇살이 예각으로 흐르는 물을 비추면 은빛 너울에 눈이 부셨다. 물 밖에서 어망을 어깨에 두르고 햇살이 비추는 물살로 들어서 조금 물살이 센 여울에서 수면을 응시하시던 큰아버님은 역광 속에서 거인과도 같이 커 보였다. 난 아직까지도 큰아버님보다 완벽한 투망질을 본적이 없다. 투망질이라는 것이 고기 떼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이상적인 타이밍을 노려 던져야 하는데 이때 투망이 원하는 형상으로 펴지지 않으면 헛수고가 되기 마련이다. 큰아버님이 던지는 투망은 내가 기억하는 한 단 한 번도 그렇게 헛수고가 된 적이 없었다. 세네 번의 투망이면 내 손에 들려진 어망의 가장 아래 칸이 가득 찼다. 피라미 갈겨니가 투망을 건져 올리는 순간에 은빛 뱃살을 퍼덕거리면 무거운 납추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것은 당신의 의식과도 같이 거룩해보이기까지 했다.
단 한 번도 다섯 번을 넘지 않았던 투망질을 마치면 물가에서 그물에 걸린 수초들을 떼어내고 자갈을 골라낸 큰아버님과 묵직한 어망을 손에 쥔 나는 무심천변의 큰집 수돗가로 향했다. 대야에 넣어진 고기들의 배를 따고 내장과 부레를 제거하고 깨끗이 헹구어내면 저녁 끼니때가 되었다. 큰어머니께서는 후라이팬에 고기를 튀기거나 양념을 한 조림으로 내어오셨다. 가시가 많아 어린 내가 통째로 먹기에는 힘이 들었지만 그런 날이면 늘 큰집 상 한 구석에는 내가 앉는 자리가 있기 마련이었다. 비린 것이라고는 한 달에 한두 번 꽁치구이나 조림이 전부였던 시절에 갓 조리된 이 민물고기 조림과 구이는 내게 참으로 별미였다. 얇은 가시 사이로 흰 살을 베어 물면 여릿한 비린내와 함께 올라오던 연한 수박향기의 식감은 지금도 내 혀 속에서 생생하게 맴돌아나간다.
그 분께서 지난 설 연휴 끝 무렵에 돌아가셨다. 86세. 그 여름날의 시간 이외에 단 한 번도 큰아버님께서 주어진 시간을 당신을 위해 쓰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10 대에 가장이 되어 두 동생을 성혼시키시고 나머지 인생을 당신의 자식들을 위해 정말로 알뜰히 소모하신 일생이었다. 선산의 장지에서 당신의 유일한 도락을 함께했던 내게 둥그런 나무 밥상 너머에서 지어주시던 미소를 그 맛과 함께 떠올렸다. 너무도 꼼꼼한 성정 탓에 매일 재봉틀 기름이 마를 날 없던, 10 년이 넘어도 늘 새것 같던 자전거를 타고 내 대학 합격 소식에 집안의 첫 대학생이라 기뻐하며 내 대학 입학금을 전해주시던 당신, 내년 첫 기일엔 큰 댁의 큰 형님을 졸라 어디 청주 가까운 시골 장에 가서라도 장을 봐 피라미 조림을 올려보자 떼를 쓸 터이다. 비록 그 맛은 아닐지라도 큰아버님의 미소와 함께했던 내 은밀한 기억의 한 자락을, 그때는 이미 성인이 되었거나 반쯤 성인이 되어서 함께하지 못했던 큰댁의 형들께 돌려드려야 될 일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래도 형들이 함께하셨으면 더 행복해하셨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겠다. 이미 너무 슬퍼한 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