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고 떫고 쓰면서 달고, 혀끝이 아리송

박미향 2008.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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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쿠도 로호(Escudo Rojo, 칠레 2006) ②
 
붉은 색 상표 덕에 한때  ‘붉은 악마’에게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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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꽤 흘렀다. 밤이 깊어지자 와인바 테이블마다 손님들이 제법 들었다. 여기저기서 잔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그 사이로 간간이 웃음소리도 퍼졌다. 붉은 와인이 혓바늘 곳곳, 세포 하나하나를 적시듯 사람들의 흥도 점차 고조돼가고 있었다. 와인전문가 S가 ‘에스쿠도 로호’ 한 잔을 한 입 가득 물고 후루룩 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맛을 봤다. 나 역시 그를 따라 입안에 ‘에스쿠도 로호’를 밀어 넣었다. 내 첫 느낌은 쓴맛. 전문가인 그의 맛 느낌은 어떨까?
 
“신맛이 조금 있고 탄닌(떫은 맛)은 중간 정도, 알콜은 좀 높은 듯하네요. 알콜 맛이 쓴맛으로 이어지죠. 단맛은 약하고 바디(물무게감)는 중간 정도입니다. 과일향이 풍부하고 맛있어요.”
 
입 안에 느껴지는 무게에 따라서도 3가지로 나눠
 
아리송한 맛이다. 그는 와인의 맛을 감별하는 기준엔 6가지가 있다고 일러줬다. 신맛(산도)과 단맛(당도), 떫은맛(탄닌), 쓴맛(알콜)의 4가지 맛과 바디감(물무게감), 피니시(잔향)가 그것이다.
 
다른 건 대충 알겠는데 ‘바디감’이라? 생소하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바디감이란 와인을 마셨을 때 입 안에서 느껴지는 무게를 말한다. 예를 들면 물과 꿀차를 마셨을 때 다른 느낌 같은 것이다. 물은 상대적으로 가볍고 그 보다 끈적거리는 꿀차는 무겁다. 바디는 풀바디와 미디엄바디, 라이트 바디로 나눌 수 있다. 풀 바디가 우유를 마셨을 때 느껴지는 입안의 감이라면 라이트 바디는 물을 한 모금 마셨을 때의 무게감이라고 보면 된다.
 
술을 마실 때마다 매번 복잡하게 머리 속에 이 여섯 가지를 떠올리며 마시다 술자리 흥을 깨는 건 아닐까? 하지만 좋은 음악은 귀에 익어야만 그 깊이를 더 알게 되듯 와인 역시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탐구해 볼 숙제다. 
 
그가 자신이 갖고 온 ‘샹볼 뮤지니’를 마셔볼 것을 권했다. ‘샹볼 뮤지니’는 프랑스 부르고뉴를 대표하는 와인 중의 하나다. 다소 흥분된 마음으로 한 모금 들이켰다. 조금 전 ‘에스쿠도 로호’와는 180도 다른 느낌이 입안에 확 번진다. 장미정원에 온 듯한 분위기랄까. ‘에스쿠도 로호’가 끈적끈적 달라붙는 듯하다면 ‘샹볼 뮤지니’는 바람이 솔솔 통하는 시원한 비단이 연상됐다.
 
그는 여기에 덧붙여 샹볼 뮤지니에선 볏짚과 감초 맛이 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 와인에 대한 더욱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뤘다. 그가 에스쿠도 로호와 함께 이 와인을 마셔보라고 한 이유는 같은 술이지만 이렇게 맛의 차이가 확연하게 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란다. 이것이 바로 와인의 매력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그는 혀가 구분할 수 있는 네가지 맛과 바디감, 피니시 중에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밸런스(균형)가 완벽한 와인을 가장 좋은 와인으로 꼽았다.
 
‘붉은’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왠지 사람을 아프게 한다
 
빙글빙글 와인 잔을 돌리며 조금씩 마시다보니 붉은 와인라벨이 상처 입은 심장처럼 취기에 실려 눈 안에 아프게 들어왔다. ‘붉은’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왠지 사람을 아프게 하는 듯하다. 취기가 오르는 탓인가.
 
- ‘에스쿠도 로호’가 무슨 뜻인가요?
= 스페인어로 ‘붉은 방패’란 뜻입니다. 한때 붉은 색 때문에 월드컵 응원단 ‘붉은 악마’에게 인기가 있었다더군요. 붉은 방패는 독일어로 ‘Rot Schild’인데 이를 영어식으로 읽으면 로스칠드가 되지요. 와인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은 로스칠드가 낯익을 겁니다. 유명한 와인 ‘샤토 무통 로스칠드’와 '사토 라피드 로스칠드'를 만든 로스칠드(Rothschild) 가문과 '에스쿠도 로호'는 아주 큰 연관이 있어요. 로스칠드 가문의 역사를 알지 않고는 '에스쿠도 로호'를 만든 이들을 알 수 없지요.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untitled-7_copy_2.jpg세계적인 금융재벌 로스칠드는 원래 독일의 가난한 유대인 집안이었다. 그러다 고리대금업으로 큰돈을 번 뒤 유럽 5곳에 은행을 세우고 각각의 지역(빈, 런던, 파리, 나폴리, 프랑크푸르트)에 아들 다섯을 보냈다. 이 가문의 문장 ‘붉은 방패’에 그려져 있는 5개 화살은 바로 이 다섯 아들을 가리킨다. 
 
특히 그 가운데 영국으로 간 네이선 마이어 로스칠드는 통신원을 매수해 1815년 워털루 전쟁의 승리 소식을 남보다 먼저 알아내 금융시장에서 큰 돈을 번 것으로 유명하다. 그 뒤 네이선의 아들이 1853년 프랑스 보르도 메독 지방에 있는 뽀이약마을 포도밭을 샀는데 이것이 바로 와인명가 로스칠드의 시초였다고 한다. 와인전문가 S는 “당시 그는 와인에 대해 큰 애정이 있었다기보다는 상류층 인사들과의 교류를 위한 수단으로 와인에 손을 댔다”고 말했다. 이후 1922년 와인사업을 물려받은 그의 증손자 바롱 필립 드 로스칠드에 의해 로스칠드 가문은 세계적인 와인기업으로 성장했다.
 
칠레는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는 천혜의 명당
  
- 그럼 그 바롱 필립이 이 칠레 와인도 만들었나요?
= 아닙니다. 1988년 바롱 필립이 죽자 그의 딸 바로네스 필리핀 드 로스칠드가 와이너리를 물려받았지요, ‘에스쿠도 로호’는 그가 1997년 이후 자회사 ‘바롱 필립 드 로스칠드 마이포 칠레’를 설립하고 만든 와인입니다. 원래 연극배우였는데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와인 명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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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하필 칠레로 갔죠?
 = 칠레는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고 있어요. 명당 포도밭은 배산임수입니다. 칠레의 포도밭은 서쪽은 태평양, 동쪽은 안데스 산맥과 아타카마 사막, 남쪽은 남극의 빙하로 둘려 싸여 있습니다. 낮엔 따스하고 밤에는 시원합니다. 바로네스도 이런 칠레의 기후에 반했지요.
 
- 그럼, 그 이전엔 칠레에 와인이 없었나요?
= 자신들만의 브랜드 와인이 있었지요. 와인 자체를 산업화하려니깐 세계적인 포도품종을 들여와서 세계인의 입맛에 맞추려는 노력을 정부가 하기 시작했죠. 와인 컨설팅 해주는 자나 와인과 관련된 업자들의 입장에서도 칠레는 돈벌이가 되는 나라입니다. 칠레는 봄에 포도를 수확합니다. 프랑스는 가을에 거두지요. 이 두 곳에서 사업을 하면 1년에 두 번 수확하는 꼴이 되지요.
 
‘에스쿠도 로호’/4만원/생산지역 칠레 센트럴 밸리/도수 13.5%/포도품종 까르메네르, 까베르네 쇼비뇽, 시라, 까베르네 프랑/블렌드 와인
   
박미향 한겨레 맛전문기자 mh@hani.co.kr, 사진 바롱 필립 드 로칠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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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 기자
한겨레신문에서 음식문화에 관한 다양한 기사를 쓰고 있다. 2000년에 직장인들의 야식을 주제로 한 연재물 '밤참'을 시작으로 먹을거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인생이 있는 식탁> 등 4권의 음식 관련 책을 냈다. MBC <여성시대> 등에 출연해 맛난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체력과 품 넓은 열정을 재산 삼아 맛과 이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문화 정착에 자신의 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행복의 시작은 밥상이 출발이라고 믿는다.
이메일 : mh@hani.co.kr       트위터 : psols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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