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겹살, 12시간 자수하니 살살 녹네

박미향 2012.04.29
조회수 26772 추천수 0

맛있는 음식에 숨겨진 재미난 과학원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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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온조리법을 이용한 ‘삼겹살과 항정살 듀오’

 

11월29일 오후 3시 서울의 한 레스토랑. 점심나절 불나방처럼 달려들던 식객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정적이 감돈다. ‘닫음’ 팻말이 붙은 레스토랑 안의 인간이란, 이발소에 걸린 명화처럼 어색한 존재다.

 떫은 공기를 깨뜨린 이는 요리사 토미 리(36·‘비스트로 드 욘트빌’의 요리사)였다. 약속시간보다

10분 늦게 나타났지만 반갑기만 하다. 작고 다부진 몸매에 빠른 부산 억양으로 ‘미안해요’를 외치는

모습이 밉지 않다. 이제부터 들을 그의 주방 이야기에 비하면 10분쯤이야! 그는 특이한 방법으로

삼겹살구이를 한다. 그릴에 굽는 것도, 높은 화력의 팬에 볶는 것도 아니다. 지글지글 소리도 없다.

썰고 볶고 지지고 끓이는 그의 주방에서 삼겹살은 도대체 어떤 일을 겪는 것일까?
“얘기하기 전에 이 책부터 보는 게 좋을 깁니더.” 후다닥 두꺼운 책을 가져온다.

토머스 켈러(미국의 세계적인 요리사)의 각종 요리법이 세련된 사진들과 함께 빽빽하게 적힌 책이다.

 “이 사진부터 보시죠.” 2장의 사진 속에 요리법이 숨어 있었다. 첫 번째 사진은 진공포장된 식재료다.

 다른 사진은 진공포장된 식재료가 수비드(sous-vide·저온진공조리법)의 기계 안에서 마치 바닷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흐느적거리는 사진이었다. 아! 바로 이거로군. 그의 삼겹살들이 겪는 여정이.

그의 삼겹살은 하루 정도 소금과 설탕이 녹아 있는 물에 잠겨 있다가 진공포장된다. 이때 당근과

육수도 함께 포장된다. 삼겹살은 따끈한 물이 가득한 수비드 기계에 12시간 갇혀 있다.

무려 12시간이다. 이 긴 시간 삼겹살은 본성이 원래 야들야들했다는 듯이 변한다. 속죄한 장발장이

따로 없다. 딱딱했던 삼겹살이 더없이 ‘부드러운 놈’으로 변한다.
수비드 기계(오른쪽 사진)는 신기한 놈이다. 실험실 장치처럼 정확하다. 기계는 온도가 고정되어

있고 안에는 열선이 있다. 물의 온도가 떨어지면 재깍 열선이 뜨거워진다. 선생님의 지목을 받은

아이의 얼굴처럼 금세 달아오른다. 그 안에서 삼겹살은 익어간다. 넘실거리는 불꽃이나 얼굴을

태울 것 같은 열기는 없다. 이렇게 저온에서 장시간 익은 고기는 부드럽다. 먹기 직전에 겉만 굽는다.

12시간 동안 삼투압 현상도 일어난다. 색다른 식감이 만들어진다. 이 정도면 요리가 아니라 과학이다.

수비드는 분자요리법(재료를 기본적으로 분자로 보고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조리법)의 하나로

1970년대에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요리에 과학을 접목한 대표적인 사례다. 영양과 맛을 동시에

붙잡으려는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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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비드 기계

진공상태·저온유지 조리기구 ‘수비드’

주방을 꼼꼼히 살펴보면 이런 재미있는 원리가 곳곳에 숨어 있다. 아이스크림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다.

아이스크림의 원료가 되기도 하는 크렘 앙글레즈는 우유, 생크림, 설탕, 달걀노른자를 끓여서 만든다.

우유와  생크림을 먼저 끓인다. 살균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수비드 기계만큼 아이스크림 기계

도 신기한 녀석이다. 기계의 벽 안에는 냉동코일이 감겨 있고 원통 모양인 중앙에는 칼날이 박힌

팬이 있다. 기계가 돌 때마다 벽은 차가워져서 재료를 딱딱하게 만든다. 팬에 달린 칼날은 돌면서

벽에 붙은 차가운 덩어리를 으깬다. 서서히 아이스크림이 만들어진다. 프랑스 디저트 전문요리사

김대현씨는 “모터의 힘과 칼날의 성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요리가 아니라 과학이다.

우리의 부엌에도 과학은 숨어 있다. 된장이나 고추장, 간장 등의 장류는 미생물을 이용한

발효식품이다. 메주를 만들고, 띄우고, 장을 담그는 과정은 과학실험이다. 식물성 단백질인

콩은 적당한 농도의 소금과 만나 미생물의 작용이 시작된다. 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분해되면서

구수한 맛을 낸다. 오래 두고 먹어도 상하지 않는다.
달걀을 삶을 때도 과학의 원리가 숨어 있다. 자, 달걀을 삶아보자. 크기와 종류에 따라 결과는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가스레인지 위에서 달걀의 길고 험한 여정이 시작된다. 예상한 결과가

굴욕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집중해야 한다. 서서히 물의 온도가 올라간다. 40도가 넘는

순간 달걀의 단백질이 변하기 시작한다. 75도가 넘어서면 달걀은 익어간다. 반숙(걸쭉한 액체)과

완숙(고체)을 결정하는 것은 열을 가하는 시간이다. 이런 원리를 잘 이해한다면 냉장고에 오래

보관했던 달걀은 삶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상온에 있던 달걀보다 차다. 삶을 때

달걀이 단단해지는 것은 단백질의 화학작용 때문이다.
팬에 고기를 구울 때 고기가 눌어붙어 고생한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높은 온도에서 단백질과

금속은 화학적으로 반응한다. 고소한 고기 냄새도 화학반응 때문이다. 고기 단백질은

약 140도 이상의 고열에서 가열하면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큰 단백질 분자가 더 작은 휘발성 분자로

분해된다. 고기 냄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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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스크림 기계

과학실험과도 같은 요리의 세계

조리기구 속에도 과학적 원리가 숨어 있다. 뜨거운 국물요리를 만들 때 무심코 쇠로 된 주걱으로

저으면 ‘앗! 뜨거워’ 외치게 된다. 대부분의 금속은 열전도율이 높다. 나무로 만든 주걱을 쓰는

요리사들이 많다. 최근 스테인리스스틸 주방용구가 인기인 이유도 열전도성이 낮기 때문이다.

칼은 도마보다 단단한 재질이 낫다. 그렇지 않으면 칼날이 금세 망가진다.
요리가 현대화되면서 주방 구조도 과학적인 시스템으로 변했다. 당연하다. 온종일 서 있는

‘무림혈투의 장’에서 요리사는 힘을 아껴야 한다. 조리기구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기록이 많다. 중세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재미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주방과

조리기구의 과학화에 열정을 쏟았다. 그의 요리서, <레오나르도 다빈치, 한 천재의 은밀한 취미>를

보면 그가 만든 주방기구들은 희한하다.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주방 밖에 쌓아둔 장작을 화덕으로

바로 옮길 수 있는 기계 같은 것들이었다. 프로펠러를 이용한 자동석쇠도 만들었다.
우리는 정성을 쏟은 요리를 맛본다. 이 자연스러운 과정은 실험이 끝난 뒤 결과를 분석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요리 속에 과학이 숨어 있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참고 자료 <요리의 과학>(피터 바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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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 기자
한겨레신문에서 음식문화에 관한 다양한 기사를 쓰고 있다. 2000년에 직장인들의 야식을 주제로 한 연재물 '밤참'을 시작으로 먹을거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인생이 있는 식탁> 등 4권의 음식 관련 책을 냈다. MBC <여성시대> 등에 출연해 맛난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체력과 품 넓은 열정을 재산 삼아 맛과 이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문화 정착에 자신의 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행복의 시작은 밥상이 출발이라고 믿는다.
이메일 : mh@hani.co.kr       트위터 : psols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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