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참조기 뜯고, 낮에 굴비 발라 먹고

박미향 2012.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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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 음식은 전라도에 가까워......조기, 멸치, 삼치부터 멍게까지 화려한 레퍼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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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 추자도는 외계행성이 된다. 뜨거운 열망을 뭉쳐놓은 듯한 달은 붉고, 별처럼 반짝이는 등대는 소행성처럼 빛난다. 지구인들이 잠을 청할 때 추자항은 마치 <토탈리콜>의 우주정거장처럼 소란스럽다. 섬사람들은 수천마리 조기를 우주복처럼 단단한 고무 작업복을 입고 바구니에 담고 있다. 밤 경기가 열리는 야구장처럼 35t짜리 배는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뤼팽의 검은 실루엣을 늘어뜨린 30여명의 사람들이 촘촘한 그물에서 조기를 뜯어내고 있다. “뭐 할라고 찍소, 나가 찍히면 큰일인디!” 셔터소리 요란한 기자에게, 전라도 사투리 진한 농이 날아온다.
추자도는 제주도의 다른 부속 섬들과 달리 전라도와 가까워서 예부터 전라도 음식의 영향이 컸다. 김지순 제주향토음식 연구가는 “제주 본토에는 고춧가루를 넣은 음식이 별로 없는 것과 달리, 이곳 음식은 전라도와 비슷하다”고 특징을 말한다. 밤을 밝히는 배들이 한두 척이 아니다. 비릿한 생선냄새를 끼고 밤샘 작업 한다. 조기는 추자도를 대표하는 먹을거리다. 질 좋은 추자도 조기는 전라남도 영광과 제주도로 실려 간다. 1년에 3750t 정도 잡히고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조업한다.
조기는 전세계에 180여종이 있지만 우리나라 연해에서는 약 11종이 잡힌다. 그중에서 노란색을 띠는 참조기가 가장 인기다. 조기는 우리말 이름인데 ‘기운을 북돋워 준다’는 뜻에서 조기(助氣)라고 풀이하기도 했다. 이쯤에서 굴비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참조기를 해풍에 말린 것이 굴비다. 고려 말 이자겸은 귀양지인 영광에서 굴비를 인종에게 진상했다고 한다. 이자겸은 ‘굴복하거나 비굴하게 꺾이지 않겠다’는 뜻에서 굴비(屈非)로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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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비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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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와 달리 자작하게 된장 넣고 호박 든 ‘추자멜국’


 

추자항 선착장 앞에 있는 ‘중앙식당’은 11가지 반찬과 바삭하게 구운 굴비정식이 여행객들을 맞는다. ‘첫사랑’이 곁에 있어도 못 본 척 혼자 뜯어 먹을 욕심이 날 만큼 맛나다. 참기름과 간장으로 애벌구이를 한 다음 고추장 양념을 발라 구운 고추장굴비나 소금에 절인 뒤 몇 개월 동안 고추장에 절인 굴비장아찌는 찾아보기 힘들다. 중앙식당의 구이를 뼈째 몇 마리씩 해치워버리고 나서야 미역국에 눈길이 간다. 국 사이로 동동 돌아다니는 뭉클한 놈이 눈을 바짝 치켜뜨고 노려보고 있다. 폭 삶겨 흐느적거리는 멸치다.
섬사람들이 조기보다 더 사랑한 생선은 멸치다. 굵은 멸치로 담근 젓갈 통이 산등성이마다 골목마다 도로마다 삼삼오오 모여 있다. “(멸치가) 크기별로 잡히긴 하지만 (조림용) 건멸치는 잘 안 만든다”고 추자수협 최성근 과장이 귀띔했다. 예전 섬사람들은 10㎏짜리 옹기에 젓갈을 담갔지만 지금은 붉은색 플라스틱 통에 담근다. 추자멸치로 끓인 멜국(사진)은 “본토(제주도)와는 다르다”. 제주도 멜국이 멸치와 얼갈이배추를 넣어 끓였다면 이곳 멜국에는 된장이 자작하게 들어가고 툭 잘린 호박이 폭 빠져 있다. 백령도가 까나리액젓으로 모든 음식의 간을 하듯 이곳도 간장 대신 멸치액젓으로 맛을 낸다. 추자도 먹을거리의 완성은 멸치액젓에 있다. 자연산 회 등은 ‘제일식당’, ‘귀빈식당’ 같은 횟집을 찾으면 맛볼 수 있다.
섬사람들의 자랑거리는 멸치만이 아니다. 어업에도 종사하는 ‘나바론민박’의 주인 박종혁(49)씨는 삼치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추자도 삼치가 정말 맛나지요. 육지에는 우리가 ‘고시’라고 부르는 소삼치로 구이를 해 먹던데 우리는 3~5㎏ 정도 되는 삼치를 회로 먹어요. 참치로 아는 사람도 있어요.” 그가 80㎝ 정도 길이의 큰 삼치를 널찍한 도마에 올려놓고 자르기 시작했다. 풍채가 당당했던 녀석은 10분도 안 돼서 갈가리 찢겨 뽀얀 살을 드러냈다. 축축 늘어진 껍질은 애잔한 눈빛으로 얇게 잘려 식탁으로 이주하는 회 뭉치를 바라본다. 입에 집어넣는 순간 목 넘김이 부드럽다. 몇 시간 숙성시킨 삼치회는 또다른 개성을 발휘한다. 고소한 맛이 몇 배는 증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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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추자 양식 멍게, 단단한 육질·짙은 향으로 유명

나바론민박에서 묵는 이들은 죽순채, 파무침, 멜된장국, 굴비 등을 맛볼 수 있다. 20여곳에 이르는 민박집들이 대부분 비슷한 식사를 제공한다. 추자도 삼치는 주로 일본으로 수출된다. 국내 소비가 별로 없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박씨는 전했다.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방어도 잡힌다. 추자도 앞바다 가두리 양식장은 잡은 방어의 임시 보관소이거나 참치양식장이다. 참치 양식은 올해 처음 시작했다.
상추자도 먹을거리 여행을 마치고 하추자도로 넘어가면 제주도에서 유일한 멍게양식장을 만난다. 추자해성영어조합법인의 대표 김채완(64)씨가 주인장이다. 2007년 통영에서 멍게 종자를 받아 2008년 초부터 2헥타르, 6000여평 바다에서 양식을 시작했다. 5m 줄에 종자를 달아 바다에 던져 키운다. 추자도 멍게는 육질이 단단하고 향이 짙다. 12도에서 18도 적정 수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멍게끼리 부딪치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줄 간격이 넓다. 추자 멍게 맛이 다른 곳과 다른 이유다. 그는 2년 만에 거둬들인 멍게로 멍게비빔밥 등을 만들었다. “추자올레를 찾는 이들이 많이 드시죠. 추자버스종점이라 버스를 기다리는 이들도 많이 먹어요.”
김씨는 추자도가 고향이다. “섬은 가난해서 먹거리라고는 고구마, 보리 정도고 배고프면 낚시해서 생선을 잡아먹었죠.” 추억담이 아련하다. 그의 기억에는 냉콩나물국과 톳밥이 있다. 냉콩나물국은 추자도 사람들이 귀한 날 주로 먹었다. 톳밥은 톳(갈조류 모자반과의 해조)을 말려 삶아 쌀과 함께 지은 밥이다. “쌀이 부족해서 양을 늘리려고 만들었죠.” 먹을거리가 부족해서 생긴 음식이 오늘날 건강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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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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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 기자
한겨레신문에서 음식문화에 관한 다양한 기사를 쓰고 있다. 2000년에 직장인들의 야식을 주제로 한 연재물 '밤참'을 시작으로 먹을거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인생이 있는 식탁> 등 4권의 음식 관련 책을 냈다. MBC <여성시대> 등에 출연해 맛난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체력과 품 넓은 열정을 재산 삼아 맛과 이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문화 정착에 자신의 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행복의 시작은 밥상이 출발이라고 믿는다.
이메일 : mh@hani.co.kr       트위터 : psols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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