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세부 파밀라칸섬의 돌고래 군무, 기다리고 기다렸네
“두 유 노 산다라박?” 한국에서 왔다는 인사에 유기농 레스토랑 종업원이 대뜸 질문을 던졌다. 필리핀 세부에서 2시간여 배를 타자 눈앞에 나타난 아늑한 보홀섬. 이 섬 지역공동체의 벌꿀농장은 자연식을 소담하게 내놓는 유기농 레스토랑을 운영한다. “아이 노. 베리 베리 라이크!” 여행객들의 과장된 몸짓에 웃음이 터져 나온다. 한때 필리핀 아이돌 가수였던 산다라박이 단박에 낯선 이들을 친구로 만든다. 참치를 넣어 끓인 생선국에는 생강 냄새가 진하고, 너무 얇은 감자칩은 마치 고급 피부과에서 관리받은 흰 피부를 뜯어 튀겨낸 것처럼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양귀비도 탐낼 만한 꽃샐러드는 먹기가 아까울 정도로 아름답다. 해가 지쳐 쓰러져 누워버리자 밤하늘은 검붉게 변하고 그 자리를 메운 해풍은 천한 도시에서 상처받은 이들의 뼛속까지 달랜다.
유기농 레스토랑의 슴슴하고 담백한 음식은 ‘돌고래 에코투어’의 애피타이저이다. 가슴 벅찬 메인 요리는 꿈과 환상의 동물, 고래를 보는 것이다. 트래블러스맵과 아시아 멸종위기 동물을 만나러 온 참이다. 고래는 신기한 동물이다. 바다에 살지만 생선이 아니다. 폐로 숨을 쉬고 물속에서 새끼를 낳는 포유류다. 지능이 높고 청각이 발달했다.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면서 바다 위로 뛰어오르는 행동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해안으로 몰려와 처절한 ‘마지막’을 우리에게 시위하듯 보여주기도 한다. 물음표를 달고 다니는 고래는 소설 <백경>의 소재와 최인호 소설 <고래사냥>의 제목이 되었다.
보홀섬에서 둘쨋날, 부푼 가슴을 안고 일어난 새벽 4시, 관광안내원은 비보를 준비하고 있었다. “태풍이 몰려와요. 도저히 배가 뜰 수가 없어요.” 보홀섬에서 배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파밀라칸섬 앞바다에는 고래들이 아침나절이면 수면 위로 올라와 춤을 춘다. 고래를 보는 일은 신이 허락한 행운이 있어야 가능한 일! 할 수 없는 것, 볼 수 없는 것, 가질 수 없는 것에 우리는 착 달라붙은 껌딱지처럼 집착한다. 여행객들은 간절한 기도로 하루 보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하늘이 허락해야 가능한 아주 짧은 은빛 만남
다음날, 태풍 소식이 언제였던가 싶을 정도로 바다는 평온하고 햇살은 눈부셨다. 기도가 효험을 발휘했나. 여명을 등진 파밀라칸섬 앞바다에는 고래관광선이 여러 척 떠 있다. 같은 목적으로 아침을 기꺼이 내놓은 이들이 가득하다. “저기요, 저기, 고래 보세요.” 상 바흐혹(44) 선장의 외침이 들린다. 물컹하고 까만 고래의 등이 보인다. 1~2초다. 눈 깜박하는 순간 고래는 은빛 물결 사이로 사라진다. 정교하게 자른 종이처럼 뾰쪽한 꼬리가 사라지자 허탈하다. “이쪽이요, 이쪽!” 선장의 구릿빛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카메라를 돌려 셔터를 누르기 바쁘다. 역시 1~2초다. 고래관광은 찰나와의 싸움이다. ‘결정적 순간’을 잡아내기로 유명한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도 울고 갈 판이다. 여행객이 불쌍했는지 몇 놈은 구애를 하듯 배 가까이 와서 꼬리를 흔들고 간다. 먼발치에서 드문드문 보이는 고래지만 가슴 한쪽을 부듯하게 채워 넣기에는 충분하다. 우리는 그저 그들의 일상을 살짝 엿보려고 온 이방인이기에 이것만도 감지덕지다. 고래를 가까이에서 보려고 먹이를 던져주거나, 소음이 요란한 배로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 등은 고래 관광에서 금지된 일이다. 그저 그들이 찾아와 주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 이것이 고래 관광의 원칙이다.
파밀라칸섬은 필리핀의 700여 섬 중에서 11종의 돌고래가 서식하는 곳이다. 참치, 오징어 등 먹을거리가 풍부하고 상어나 바다거북의 서식지로도 알려져 있다. 섬 일대에서 고래 관광을 시작한 지는 고작 10년 정도밖에 안 됐다. 바흐혹 선장은 예전에는 고래를 잡아 생계를 유지했다. 운 좋을 때는 한 주에 약 3마리씩 잡았다. 당시 마리당 1000페소를 받고 팔았다. 섬사람들 대부분은 상 바흐혹처럼 고래를 잡아 먹고살았다. 1998년 3월 필리핀 정부가 고래 사냥을 금지하자 섬 주민들은 크게 반발했다. 필리핀 환경단체 사람들이 속속 이 섬을 찾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섬 주민들을 교육하고 고래 관광업으로 생업을 바꾸도록 설득했다. 이제 섬 주민들은 고래 투어 배를 띄운다. 바흐혹 선장은 한번 배가 나갈 때마다 300페소 정도를 받는다고 한다. “처음에는 관광객이 안 올 것 같아 걱정했습니다. 이제는 해양 동물을 보호한다는 생각에 자부심이 생겼어요. 안정적인 수입도 되고요.” 4명의 자녀를 키우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고 덧붙였다.
고래잡이의 역사는 잔인하다. 모성애가 강한 고래의 성질을 이용해 새끼부터 작살로 죽이기도 했다. 어미는 죽은 새끼 곁을 뜨지 못하고 이내 잡히고 만다. 1986년 국제포경협회가 포경금지협약을 체결하자 비극은 줄었지만 여전히 몇몇 나라에서는 잔인한 방법으로 고래를 잡는다고 알려져 있다. 고래는 인간을 시험하는 동물이다.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수많은 본능 중에서 ‘진짜’는 무엇인가, 질문을 던진다.
올랑고섬 습지의 97종 철새, 잊지 못할 아바탄강 반딧불이
이제 ‘돌고래에코투어’의 디저트 차례다. 세부에서 배로 20여분 달리면 올랑고섬에 도착한다. 파밀라칸섬처럼 필리핀 엔지오들이 방문해 에코여행지로 탈바꿈한 곳이다. 어부 마욘분딴(40)은 어부들의 전통적인 어로 방법을 시연한다. 천으로 만든 가짜 문어가 미끼라니, 믿기지 않지만 재미있다. 지역주민이 만든 조개목걸이는 200페소다. 툴툴, 비포장도로를 트라이시클(오토바이를 개조한 삼륜자동차)로 달리면 어느 틈에 활짝 웃으며 맨발로 달려오는 아이들이 손을 흔든다.
올랑고 야생생물보호지는 빼놓을 수 없는 에코여행지다. 1992년 필리핀 정부는 올랑고섬의 920㏊를 야생생물보호지로 지정했다. 1994년엔 필리핀 최초로 람사르협약(국제습지조약)에 등록되었다. 시베리아, 한국, 중국 북부, 일본 등에서 날아온 철새들은 이곳에서 겨울을 보내거나 중간 기착지로 지낸다. 야생철새 97종이 서식하는 이곳은 맹그로브숲이 아늑하게 싸고 있다. 총 5가지 구역으로 나뉘는데 가운데 보호구역에는 철새를 관찰할 수 있는 망원경이 있다. 발가락에 찰랑찰랑 ‘밀고 당기기’ 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바닷물이, 머리 위로 휘휘 부는 바람과 구름과 새보다 더 매력적이다.
매력이 야생생물보호지뿐이겠는가! 밤 9시 보홀섬의 아바탄강. 반딧불 여행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에코여행의 마지막 달콤한 디저트다. 반딧불이 수백 마리가 저마다의 화려하고 찬란한 빛을 뿜으며 나무에 붙어 있었다.
올랑고섬·보홀섬(필리핀)=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sc·트래블러스맵 공동기획
필리핀 여행쪽지
한 손에 잡히는 원숭이 타르시어
⊙ 인천국제공항에서 필리핀 세부까지는 4시간. 세부에서 올랑고섬까지는 배로 20여분, 세부에서 보홀섬까지는 배로 2시간여 거리.
⊙ 코코넛 빌리지 | 올랑고섬에 있는 마을. 섬 주민이 직접 나무에 올라가 코코넛 따는 시범을 보여준다. 코코넛꽃으로 만든 술을 맛볼 수 도 있다. 코코넛 술은 꽃즙과 맹그로브 식물에서 추출한 향신료를 넣어 이틀 숙성시켜 만든다. 2주 더 숙성시키면 코코넛 식초가 된다.
⊙ 필리핀 타르시어 관찰 | 일명 안경원숭이.(사진) 세계에서 가장 작은 크기(12cm 안팎)의 영장류. 필리핀 보홀섬에는 타르시어 관찰지가 있다. 인도, 말레이시아 등에도 살지만 필리핀 보홀섬에 가장 많이 서식한다고 알려져 있다. 1998년부터 기부금을 받고 관람객을 받았으나 지난 10월8일부터 입장료 15페소를 받고 있다. 이 관찰지에는 타르시어 120여마리가 산다.
⊙ 초콜릿 힐 | 보홀의 타그빌라란에서 차로 40분 이상 내륙으로 달리면 초콜릿을 엎어놓은 듯한 언덕들을 발견한다. 강수량에 따라 언덕을 덮고 있는 풀의 색깔이 변한다. 건기에 갈색으로 변하는데, 마치 그 모양이 키세스 초콜릿과 닮아 초콜릿 힐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 트래블러스맵에서는 ‘돌고래에코투어’ 여행객을 11월 중순부터 모집한다. 여행은 12월부터. 여행문의는 트래블러스맵 누리집(travelersmap.co.kr). (02)2068-2788~27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