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반죽에 사랑 얹었더니 꽃내음 물씬

박미향 2011.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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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서지초가뜰 최영간씨의 꽃전…대대로 내려온 종부들의 손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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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욕심 없이 세상을 떠돌던 조선시대 로맨티시스트 김삿갓이 ‘1년 봄빛을 뱃속에 전하누나’라고 예찬한 음식이 있다. 무엇이기에 발길 닿는 대로 떠돌던 이가 애정을 듬뿍 담아 한 줄 시로 남겼을까? 그의 시에서 실마리를 찾아보자. ‘작은 시냇가에서 솥뚜껑을 돌에다 받쳐/ 흰 가루와 푸른 기름으로 두견화를 지져/ 쌍젓가락으로 집어 먹으니 향기가 가득하고’
 눈치 빠른 이라면 ‘옳다구나’ 무릎을 쳤을 터. ‘두견화’에 정답이 있다. 김삿갓이 극찬한 음식은 두견화전(진달래 화전)이다. 우리 조상들은 봄이 되면 하던 일 멈추고 신이 내린 선물, 봄볕에 감사하며 들로 산으로 ‘놀이’를 갔다. 시원한 계곡물에 얼굴을 닦고 진달래 화전을 부쳐 먹었다. ‘화전놀이’이다.
 냉이, 달래무침 같은 봄나물만큼이나 봄날 오장육부를 즐겁게 해주는 음식이 화전이다. 화전은 찹쌀가루를 더운물로 반죽해 동글게 빚어서 기름에 지진 뒤 진달래꽃이나 대추, 쑥갓 등으로 문양을 만든 전병이다. 봄에는 진달래, 여름에는 장미, 가을에는 국화를 사용했다. 조선시대 최초 한글조리서 <음식디미방>(1670년께)에는 찹쌀가루에 메밀가루를 섞어 쓰기도 했지만 <증보산림경제>(1766년) 등의 기록물 이후에는 찹쌀가루만 사용한 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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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난곡동 264번지. ‘서지초가뜰’에는 김삿갓이 반한 진달래 화전과 독특한 모양의 화전이 있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3시간 정도 달리면 서지초가뜰로 이어지는 고불고불 흙길이 나온다. 부드러운 봄바람이 먼길 달려온 나그네의 수고를 위로하고, 언덕 위에 핀 붉은 진달래꽃과 매화가 힘찬 노랫소리로 반갑게 맞는다. 비발디의 ‘사계’의 첫 번째 곡, 봄의 한 소절 같다. 악장 사이로 춤추는 꽃들의 소리가 서지초가뜰 안마당에도 울린다.
 서지초가뜰은 창녕 조씨 9대 종부 최영간(64)씨의 집이기도 하고 종가 음식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향토음식점이기도 하다. 서지초가뜰이란 이름은 마을의 옛 이름에서 유래했다. 예부터 마을의 모양이 마치 쥐가 차곡차곡 쌀을 모아 보관하는 형상이라고 해서 ‘서지골’이라고 불렀다. ‘서지초가뜰’은 ‘서지골의 초가집 뜰’이라는 뜻이다. 최씨가 살고 있는 기와집 앞에 움막을 개조한 작은 초가집 ‘서지초가뜰’이 있다.
 “우리 동네는 참꽃이라고 해요.” 최씨가 진달래를 부르는 이름이다. 이곳에서 진달래 화전은 ‘참꽃 화전’이다. 최씨는 진달래, 매화 등을 따서 지진 전 위에 올리기도 하고 찹쌀가루와 함께 으깨 색을 내기도 한다. 이 집 화전은 한식날 차례 상에 올라가는 송편의 웃기떡으로 쓰였다. 송편을 푸짐하게 한 그릇 담으면 맨 위는 모양새가 울퉁불퉁하다. 예쁘게 하기 위해 화전을 이불처럼 덮었다. 최씨는 시어머니 김쌍기(89)씨한테 배웠다. 김씨는 시어머니에게서, 그 시어머니는 또 그 시어머니에게서 배웠다. 여자들의 손끝 맛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창녕 조씨 집안에서는 혼례를 치른 사위의 첫 번째 생일상 선물로 독특한 모양의 화전을 만들었다. 사돈댁에 축하의 의미로 여러 가지 음식을 보내는데 화전도 그중 하나였다. “사돈이 손님접대를 할 거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나눠 먹기 쉬우라고 송편과 총떡을 보내요. 모두 색을 입힌 떡들이죠. 색은 즐겁다는 뜻이 담겨 있어요, 우리 민족한테는. 색동옷 같은 거죠. 화전도 그런 의미에서 같이 가는 거예요.” 화전은 송편 위에 곱게 올라간다. 모양이 아름답고 의미가 오묘하다. 휘고 도는 춤추는 곡선이 있고, 작은 은하계를 보는 것처럼 완전한 세상이 구현된 꼴이다. 작은 원과 큰 원이 서로를 격려하고 맛을 뽐낸다. 구체적인 모양새를 보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다. 복잡하지만 완결성을 가진 수학 방정식 같은, 마치 다빈치 코드를 찾는 듯한 기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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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간씨가 살고 있는 집 

 

 

화전은 조씨 집안 장모의 사위 사랑

 

 

가운데 밤이 중심을 잡고 있다. 밤은 작게 잘린 빨간 대추로 싸여 있다. “태양 빛을 만든 겁니다. ‘사위 자네는 내 딸과 함께 태양처럼 살아라’ 하는 뜻이지요.” 진달래 잎이 밤과 대추를 둥글게 감싸고 있다. “꽃의 색은 즐겁다는 뜻입니다. 생일 선물이니 즐거움을 담고 있습니다. ‘사위 자네는 내 딸과 축하받을 일만 많게나. 다른 사람에게도 축하 많이 해주게’란 뜻이에요. 축하와 축하 속에 사는 삶은 즐거운 삶이지요.” 마지막으로 3가지 색이 배합된 태극 모양의 손바닥 반만한 크기의 화전 여러 장이 병풍처럼 싸고 있다. “3태극은 우리 할머니들의 지혜가 담겨 있어요. 하늘, 땅, 사람을 뜻하는데 3가지 모두 중요하지요. ‘사위 자네는 세상에서 아주 필요한 사람이 되게. 소중한 사람이 되게’ 그런 뜻입니다. 그런 소중한 사람이 있는 직장은 또 얼마나 소중한 곳이겠어요.”
 이 오묘한 화전에 재료로 쓰인 밤과 대추, 꽃은 태몽과도 관계가 있다. “예부터 태몽이 없으면 아이도 없다고 했어요. 태몽 꼭 꾸지요. 밤이 나오면 생명잉태 확실하고, 대추는 아들, 꽃은 딸을 상징합니다.” 결혼한 딸 부부가 아들, 딸 많이 낳고 행복하게 살라는 소박하지만 어려운 기원이 음식에 담겨 있다. 최씨는 정작 자신의 사위들에게는 생일상 화전을 부쳐주지 못했다. 봄에 태어난 사위가 없다. 상견례 자리로 서지초가뜰을 찾는 이들에게 이 화전을 선물하고 있다. 쫀득쫀득한 화전은 몇 점 먹고 나면 소원한 부부도 찰떡궁합이 될 것 같은 맛이다. 향긋한 봄꽃이 주는 싱그러움까지 더해져 김삿갓의 시가 술술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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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간씨, 서지초가뜰의 손맛의 그의 정성이다.

 


 최씨는 막내 시누이의 배우자를 위해 시어머니 김씨가 30년 전 손수 만드는 것을 지켜봤다. 그는 잊지 않았다. 얇은 화전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곡선이 그려져야 했다. 쉽지 않았다. 시어머니 김씨는 서툰 며느리를 한 번도 야단치지 않았다. “어제는 잘하드니 오늘은 왜 그랬나. 나무가 안 좋나” 했다. 따스한 시어머니의 사랑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집 뒤에 있는 밤나무에서 톡톡 밤알이 떨어지면 딸들은 줍지 못하게 했다. 내막을 모르는 최씨가 신나게 주워 김씨에게 주면 “어떻게 떨어진 거 잘 보고 주워 왔네. 네 눈에만 잘 띄네” 하고 칭찬했다. 땅속에 파묻은 김치를 꺼낼 때도 며느리 최씨의 손을 꼭 붙잡고 데리고 가서 꺼냈다. 1년 내내 한 집안의 밥상을 책임지는 김치는 소중한 보물이었다. “김치가 잘 익었네. 너랑 나랑 궁합이 잘 맞는다”고 칭찬했다. 최씨는 세상을 지탱시켜줄 중요한 무엇을 ‘모성’에서 찾는다. “새끼를 바라보는 어미의 얼굴에는 어떤 불순물도 없지요. 어미는 약해 보이지만 강하지요.”
 서지초가뜰에 핀 진달래는 가양주 송죽두견주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종택 뒤에 300여년 동안 울창하게 자란 대나무와 소나무와 진달래를 사용해서 만든 술이다. 진달래 잎은 누룩을 버무릴 때 같이 넣고, 술 한잔 위에도 띄운다.
 이 댁은 예전 모내기를 끝내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먹은 ‘못밥상’과 마을 일꾼들이 받은 ‘질상’이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나물무침, 팥이 들어간 밥, 잡채나 호박전, 메밀묵, 감자떡, 씨종지떡 등이 올라간 상은 호화롭지는 않지만 소박한 맛이 최고인 상이었다. 최씨의 작은 꿈은 시어머니에게 배운 음식들을 잊지 않는 것, 그런 음식들을 기록한 작은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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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 기자
한겨레신문에서 음식문화에 관한 다양한 기사를 쓰고 있다. 2000년에 직장인들의 야식을 주제로 한 연재물 '밤참'을 시작으로 먹을거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인생이 있는 식탁> 등 4권의 음식 관련 책을 냈다. MBC <여성시대> 등에 출연해 맛난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체력과 품 넓은 열정을 재산 삼아 맛과 이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문화 정착에 자신의 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행복의 시작은 밥상이 출발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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