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대학 교수님 된 소꼽친구, 루콜라 향기다
“폭탄주 1잔에 그랬던 네가 10잔도 괜찮다고?”

오랜만이었다. 그의 가늘고 앙상한 손마디를 잡은 것이, 얇은 어깨를 감싸 안은 것이. 7년 전 한국을 떠나 영국에 둥지 튼 친구를 만났다. 몇 년 안에 돌아올 줄 알았던 그의 유학길은 길어졌다.
“네가 영국 학생들 앞에서 영어로만 강의한다니 멋진데?” “영국인들은 대학원 수업료가 비싸서 별로 없고,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이 많아.” 친구 ㅇ은 배시시 웃는다. 그는 영국 대학 교수님이 되었다. 초등학교와 여고 친구인 ㅇ은 이슬 앉은 루콜라처럼 청량하고 향기가 진한 사람이다.
그의 엄마 손맛 맛볼 수 있는 건 100점 맞는 것보다 기뻤다
간혹 그의 기품 앞에 방정맞은 나의 철없음은 여지없이 무너지곤 했다. 인생에서 소중한 사람을 꼽으라면 그는 당연 상위권이다. 현명하고 똑똑하지만 한없이 겸손한 그는 나에게 스승이었다. “요즘도 그렇게 마셔? 그 직업은 참….” 염려하는 소리가 들린다. ㅇ은 대학 1학년 때 딱 한 잔의 폭탄주를 마시고 바로 쓰러진 나를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업혔다. 인생의 첫 남자 등짝이 ‘영양가 없는’ 친구의 남친이라니!
그의 가르침 중에 가장 훌륭한 것은 ‘초절정 낙관주의’와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는 사람의 밝은 면을 먼저 보고, 진심으로 칭찬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그런 그조차 몇 년 전 한국에 잠깐 들어왔을 때 힘겨운 타향살이의 흔적이 역력해 가슴이 아팠다.
영국에는 없는 것, 여기서만 먹을 수 있는 것, 적게 먹고 단아한 생활을 하는 그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찾았다. 한식 코스요리? 3분의 1은 버리는 엄청난 양의 음식, 그가 좋아할 리 없다. 사찰음식, 맛깔스러운 기억을 남길 수 있을까?
그의 가는 팔을 끌어당겨 간 집은 간장게장집이었다. 누런 유기그릇에 소복한 밥, 양념을 전혀 바르지 않고 바싹 구운 김, 큰 접시에 뭉클한 살점이 ‘나 잡아봐라’ 약 올리며 삐죽 튀어나온 게들. 예전에는 꽃게보다 작은 참게로 간장게장을 해먹었다고 한다. 꽃게는 주로 매운 양념에 재워먹었다. “맛있네. 어릴 때 엄마가 해준 간장게장 맛이야.” 친구가 좋아라 한다.
ㅇ의 어머니는 나주가 고향이다. 전라도가 고향인 분답게 음식 솜씨가 남달라서 친구들은 그의 집으로 달려가는 일이 시험점수 100점 맞는 것보다 기쁜 일이었다. “너 여전하다. 하나도 안 늙었는데.” “아니야, 늙었지.” 역시 그는 솔직하다. 아줌마들의 이런 대화는 비웃음을 자아낸다. 아무리 봐도 늙었는데 자신들은 ‘여전히 20대’란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아마도 또 4~5년은…
우리는 가회동 ‘에릭 케제르’로 옮겼다. 에릭 케제르는 천연발효빵(천연효모를 사용한 빵)을 파는 프랑스 빵집이다. 1996년 파리 몽주 8번가에 셰프 에릭 케제르가 문을 연 이후 일본, 그리스, 러시아, 모로코 등에 지점을 늘려왔다. 한국지점은 에릭 케제르에게서 기술을 전수받은 프랑스 셰프가 맛을 책임지고 있다.
여러 종류의 빵들 중에서 푸가스가 눈에 띈다. 푸가스는 프랑스 사람들의 든든한 한끼 식사다. 허브빵 위에 에멘탈치즈를 올리고, 그 위에 여러 가지 치즈, 토마토, 고기, 채소 등이 토핑으로 올라간다. ‘토마토 앤 모차렐라 푸가스’는 씹는 순간 토마토가 톡 터진다. 프랑스 시골마을 아낙네처럼 소박한 기운이 잔상으로 남는다. 치즈의 고향 프랑스답게 빵 위에 올라간 치즈는 화려한 비상을 한다.
2층에 자리를 잡았다. 창은 휴일 나들이에 나선 가족들의 소란스러운 풍경과 멀리 북한산 자락의 바람을 안겨주었다. 묵은 김치처럼 오래된 우정은 소란스러운 세상사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에 대해 한참 떠들다 아이 이야기로 이어졌다.
“지한파인 우리 아들 때문에 한국에 들어와야 할 텐데…” “주변을 보니 우리나라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게 쉽지 않던데?” 서로에 대한 걱정으로 넘어가면서 그는 영국 신문 <가디언>에 대해 이야기했다. “출근하면서 한 부 사면 읽을거리가 너무 많아.” 한국 신문에 대한 그의 걱정이다. 그리운 친구,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아마도 또 4~5년은 걸리겠지.
글·사진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