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친 없을거라는 편견, 보란듯이 “레어”

박미향 2011.05.26
조회수 23878 추천수 0

여우도 아니고 보이시하지도 않은 5차원의 그
진실 대신 거짓을 무기로 아바타 만들어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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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스 컷의 국내산 한우로 만든 '뉴욕 스트립,코리언'스테이크

 

 

“남자친구는 있어요?” 2007년 후배 ㅈ이 한 디자인회사에 입사해서 들은 첫 질문이다. ㅈ은 “있다”고 답해버렸다. 괴짜 중에 괴짜인 ㅈ, 4~5차원 정도 되는 기발한 뇌 구조를 가진 ㅈ, 이마에 ‘진실’이란 글자가 꽉 박혀 있는 ㅈ. 그가 툭 던져버리듯이 답한 “있다”에는 엄청난 비밀과 철학이 숨겨져 있었다.

“사람들은 제가 당연히 남자친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더라구요.” ㅈ은 남자란 남자는 모두 홀릴 것 같은 여우 타입도 아니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을 만큼 귀엽지도 않고, 보이시한 분위기로 남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지도 않았다.
그는 안 예쁜 여자는 남자친구가 당연히 없을 거라 여기는 세상의 편견과 홀연히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없다”라는 진실 대신에 “있다”라는 거짓을 무기로 선택한 것. 그는 배우 박신양과 몇 명의 주변 남자들을 추려 ‘짬뽕 캐릭터’를 만들었다.

기념일이 되면 꽃을 보내주고 “애기야” 소리도 앙증맞게 해주는 멋진 애인이 탄생했다. 한동안 그는 신났다. 자신 앞으로 꽃 배달을 하고 “왜 반지가 없냐”는 직장 동료들의 성화에 반지도 맞췄다.
편견과의 싸움은 예상을 뛰어넘어 험난했다. 남자친구를 고향에 있는 것으로 설정한 탓에 고향을 다녀오면 “만나서 뭐했어?”란 질문이 쏟아졌고 “그냥 얘기하죠”라고 답하면 내숭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연인들의 애정행각이라고는 도통 손톱의 때만큼도 모르는 그는 점점 고통에 시달렸다. 급기야 모태솔로인 여자 후배가 연애상담을 해오기까지 했다. 1년 뒤 그는 투쟁을 접었다. 세상에 경종을 울리는 선에서 타협했다.
그와 이태원의 조용한 레스토랑 ‘부처스 컷’(BUTCHER’S CUT)을 찾았다. 삼원가든이 문을 연 드라이에이징(건조숙성) 스테이크하우스다. 고기를 밥보다 좋아하는 그를 위한 자리였다. “스테이크에도 편견이 있는 거 알아?” 동석한 ㅇ이 한마디 한다.

스테이크를 주문할 때 선택하는 고기 굽기의 정도를 보고 ‘좀 먹을 줄 아네’, ‘전혀 뭘 모르는구만’ 하는 식으로 판단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스테이크는 웰던, 미디엄 웰던, 미디엄, 미디엄 레어, 레어 등의 굽기 방법이 있다. 속을 덜 익히는 순이다.

고기는 익힐수록 ‘마야르 반응’(식품의 가열처리, 조리 중 일어나는 성분 간 반응) 때문에 고기 특유의 향은 살아나지만 수분이 없어지면서 단단해지고 육즙도 사라져간다. 레어는 겉은 단단하고 속의 육즙은 잘 살아 있는 상태다. 붉은색의 피가 뚝뚝 칼날에 묻어나는 레어 상태를 좋아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덜 익히는 것에 대한 우려와 물컹한 식감을 싫어하는 이들도 있다.

얼굴이 제각각이듯 혀의 선택도 사람마다 다르다. 마틴 루서 킹처럼 세상의 편견과 싸운 ㅈ에게 물었다. “너는 어떤 상태로 구워달라고 할까?”(부처스 컷 02-798-8782)

 

글,사진 박미향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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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 기자
한겨레신문에서 음식문화에 관한 다양한 기사를 쓰고 있다. 2000년에 직장인들의 야식을 주제로 한 연재물 '밤참'을 시작으로 먹을거리와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 가면 취하고 싶다>, <인생이 있는 식탁> 등 4권의 음식 관련 책을 냈다. MBC <여성시대> 등에 출연해 맛난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타고난 체력과 품 넓은 열정을 재산 삼아 맛과 이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문화 정착에 자신의 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행복의 시작은 밥상이 출발이라고 믿는다.
이메일 : mh@hani.co.kr       트위터 : psols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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