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눈처럼 하얀 냉장고가 시골집 마당에 들어서던 날을 기억한다. 엄마는 동네 아주머니들과 곗돈을 모아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 둘 장만하시곤 했다. 그중 가장 귀하고 신기했던 것이 냉장고였다. 한여름에도 이가 시리도록 시원한 물이며 과일을 맛볼 수 있었고, 알이 말간 얼음을 둥둥 띄운 미숫가루를 한 대접 타서 친구들과 나누어 마시며 생색을 낼 수 있었기에 나는 우리 집에 냉장고가 있다는 것이 정말 자랑스러웠다.
그 옛날부터 엄마는 냉장고를 맹신하셨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음식이 냉장고에 들어가면 한 달이고 일 년이고 엄마가 필요에 의해 꺼내어 쓸 때까지 상하지 않을 것이라는 무서운 신념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 냉장고는 늘 포화상태였고, 지금까지도 그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조금 자라서는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먹지도 못하고 냉장고 안에서 썩어나가는 음식들로 엄마와 나는 늘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였다.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생선도 냉장고에 있었기 때문에 괜찮다는 엄마의 고집에 심한 말로 상처를 드린 적도 있었고, 엄마가 외출하신 틈을 타서 냉장고를 가득 채운 음식들을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덥석 들어다가 버린 날도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철없던 내 행동이 한없이 부끄러워 가슴이 먹먹해진다. 없는 살림에 일곱 식구 끼니 챙기기가 녹녹치 않으셨을 엄마의 고단함을 모르고 위생이 어쩌니 세균이 어쩌니 하며 제 어미를 가르치려는 못난 딸을 보며 엄마는 얼마나 야속하셨을까.
그 때의 엄마 나이가 돼서 내 살림을 살다 보니 이제야 깨닫는 것이 많다. 냉장고에 가득했던 봉지 봉지에 담겨있던 것이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가족을 염려하고 조금이라도 더 챙기려 했던 엄마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지금도 시골집 냉장고는 포화상태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냉장고 옆을 지나가기만 해도 그 후끈한 열기가 ‘훅’하고 느껴진다. 가끔은 ‘이러다 터지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별다른 말없이 양푼을 집어 든다.
“엄마, 밥 비빈다.”
시어 꼬부라진 열무김치에 시들시들한 상추 한 줌 뜯어 넣고, 끝이 무른 오이는 뚝 잘라 버리고 곱게 채 썰어서 벌건 고추장에 쓱쓱 비벼 참기름 듬뿍 넣고 숟가락 꽂아서 온가족이 둘러앉아 퍼먹는다. 허투루 나가는 것 없이 알뜰하게 먹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시는 엄마를 보면 그 어떤 진수성찬도 부럽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별식이 된다. 일명 ‘냉장고 청소 비빔밥’이라고도 부르는데 딸내미들과 엄마가 간만에 모여 앉아 ‘하하 호호’하며 수다 삼매경에 빠져 한 양푼 비벼 먹고 나면 세상 시름 다 잊게 되는 약밥이기도 하다.
잘 먹고 잘 놀다가 집에 갈 때쯤이면 까만 봉지들로 가득한 엄마의 냉장고는 딸내미들 트렁크로 고스란히 옮겨진다. 삶은 두릅, 고춧잎, 뽕잎, 깻잎장아찌, 마늘장아찌 등으로 가득 차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엄마의 냉장고도 ‘휴’하고 한숨을 돌리는 시간이다.
오늘도 엄마는 산과 들을 누비시며 나물을 뜯고 푸성귀를 가꾸실 것이다. 엄마의 사랑으로 가득 찬 터지기 일보 직전의 냉장고를 만들기 위해서…….